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여성경제신문은 광복 75주년을 맞아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또렷이 기억해야 할 항일여성독립운동가 75분을 1차로 8월부터
10월까지 소개한다.
아울러 항일 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미국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초상화 전시회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10월 중 열릴 예정이다.
박자혜 朴慈惠 (1895~1943)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1990)
박자혜 선생은 구한말 궁녀 출신으로,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에 입학하는 등 신교육을 받았다.
1917년부터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하던 중 3·1만세운동으로 실려 오는
부상자를 간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목사 이필주와 연결되어 병원의 동료 간호부
들과 ‘간우회(看友會)’를 조직, 각종 유인물을 배포하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또한 한국인 의사들을 규합하고 시내 국공립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0년, 더 이상 일제를 위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그만두고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 옌징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하고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22년 홀로 귀국한 뒤 생계를 위해 산파소를 열기도 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문을 닫았다. 중국의 단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
주식회사 폭파 의거 당시 사전에 위치·지리를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 간의 연락과
편의 제공에 힘을 쏟았다.
두 아들을 키우며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면서도 선생은 남편의 독립운동
활동을 내조했고, 독립운동가의 아내이기에 끊임없는 일본의 감시와 폭력을
감당하며 지냈다. 1936년 신채호 선생이 순국하자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며 애통해했다. 1942년 둘째 아들마저 숨지자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1943년 병고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초상화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그만큼 역사에서 잊힌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독립운동을 한 박자혜 선생을 위로하고 기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앞가슴에 달린 화려한 꽃은 선생에게 바치는 헌화인 셈이죠. 75점의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를 통해 앞으로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조신호 작가-
◎ 여성경제신문 김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