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원 7인, 과거와 오늘] 유해 확인 어려운 1920년 3월 사진 속 의열단 단원들
1919년 11월 10일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무장단체 의열단이 창립한 날이다. 그러나 2015년에야 의열단 초기 단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을 통해 알려졌다. 정면을 응시하는 김원봉과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정이소, 김익상 등 7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그것이다. 이들은 어디에 잠들었을까? 의열단 창립 102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가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했다. <편집자말>
[김종훈 기자]
위 사진 속 인물은 동일인이다. 좌측이 1920년 3월께 찍힌 스물한 살 의열단원 이성우의 모습이고, 우측이 1928년 3월께 찍힌 스물아홉 이성우의 모습이다. 우측은 20대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십대였던 그에게 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28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에는 "입옥 당년엔 홍안 소년, 출옥 금일엔 헌헌 장년"이라는 제목으로 "의열단 사건에 파옥사건까지 겹쳐 소년과 청춘 시대를 영창에서 지낸 밀양폭탄 수범 이성우"로 소개됐다.
옛 신문 기록처럼 이성우는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일제의 감옥에서 보냈다. 검었던 머리가 다 빠진 노인의 모습으로 옥에서 나온 그는 이듬해인 1929년 밀양에서 의열단 동지들의 간호를 받다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여기까지다.
이성우는 의열단 초기 단원 7인 중 하나인 김익상과 마찬가지로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 67번 위패에 '이성우'라는 이름 석 자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성우, 밀양의열기념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 길림성에서 이주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결혼 후인 1918년에 봉천성 합니하에 자리한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듬해인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속성과정으로 옮겨 김원봉을 비롯해 서상락, 김상윤, 이종암 등 동지들을 만나 같은해 11월 10일 의열단 창립단원으로 힘을 보탰다.
이후 행적은 '맹렬히 의를 실천한다'는 의열단 강령에 따른 활동의 연속이었다. 이성우는 의열단 창단 직후 기획된 제1차 거사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중국 상해로 이동해 어렵게 폭약과 권총, 탄환을 구입한 그는 이를 안동현으로 운반한 후 다시 국내로 밀반입했다. 이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성우를 비롯해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정이소가 1920년 3월께 상해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진이다.
이성우는 1920년 5월 서울에 잠입한다. 그러나 결행을 위해 대기하던 중 밀정의 첩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6월 20일 서울 인사동에서 붙잡히고 만다. 의열단 창립 후 일제에 잡힌 최초의 단원이 되고 만 것이다.
이성우는 의열단 내부에서 선임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동지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일제가 그를 '수범(首犯)'으로 지목해 적극적으로 심문하고 고문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듬해 6월 이성우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함경북도 청진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만 2년이 지난 1922년 8월 이성우는 동료들과 공모해 탈옥을 시도한다. 불행히도 그의 탈옥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징역 2년이 가산됐다.
1928년 3월 8일, 이성우는 1920년 1차 의열단 거사 후 만 8년 만에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한다. 그러나 이성우의 몸은 이미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고, 이듬해인 1929년 서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1968년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기득, 강세우, 정이소, 김원봉은 어디에 있나
이성우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0년 3월 사진 속 주인공 7인 중 곽재기를 제외한 김익상, 김원봉, 강세우, 김기득, 정이소 역시 마찬가지다.
김기득은 1920년 여름 1차 의열단 의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곽재기, 이성우와 마찬가지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김기득 역시 일제 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받고 수감됐다. 이후 1933년 4월 6일 서른넷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사진 속에서 유독 이목구비가 뚜렷했던 의열단원 김기득에 대한 흔적은 여기까지다.
7인의 사진에서 김기득과 곽재기 사이에 섰던 의열단원 강세우의 기록 역시 많지 않다. 그나마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남긴 기록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1901년 생 강세우가 1차 의열단 의거 당시 일제의 검거망을 뚫고 탈출했다"라고 언급된 정도다. 밀양의열기념관에서는 조금더 구체적으로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난 강세우는 신흥무관학교를 거친 뒤 1919년 10월 상해로 가 중화대학에 입학했고, 12월에 상해에서 1차 의거를 준비하던 김원봉과 곽재기 등을 만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를 종합하면 강세우 역시 1차 의거에 동참했고, 다른 이들과 달리 탈출해 중국에서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강세우에 대한 흔적도 여기까지다. 1928년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이후 행적과 사망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서훈 역시 받지 못했다.
사진 속 가운데 자리한 양복 입은 신사 정이소에 대한 기록은 더 찾기 어렵다. 이에 대해 김영범 대구대학교 교수는 2015년 자신의 논문에서 "정이소라는 이름은 그 사진 속에서 딱 한 번 등장한다"며 "당시 상해에서 폭탄을 얻기 위해 애쓰던 중인 김원봉과 접촉한 상대이고 당시 상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배동선이 잠시 쓴 가명일 수 있다"라고 추정했다.
해방 후 약산 김원봉은 박태원과의 인터뷰에서 의열단 창립 단원으로 자신을 포함해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서상락, 배동선 등을 꼽았다. 그러나 정이소나 배동선, 두 이름 모두 독립유공자로 등장하진 않는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은 1919년 11월 의열단 창립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의열단 단장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으로, 민족혁명당 총서기로, 조선의용대 대장으로, 광복군 부사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후 20여 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약산을 향한 친일파의 탄압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친일경찰의 등쌀에 못이긴 김원봉은 1948년 월북한다. 이후 1958년까지 북한 정권에서 활동한 뒤 숙청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북녘땅 어디에 잠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 들어 김원봉에 대한 서훈 움직임이 일기도 했으나, 2019년 6월 청와대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조항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확인했다"며 "(정부 차원의) 서훈 추진도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상훈법상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서훈을 취소하도록 명시돼 있다.
◎ 출처 :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