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별세한 독립운동가 배선두 선생
중국대륙에서 독립군을 찾아 헤맨 사람들 중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부류가 있었다.
한쪽은 박정희나 백선엽처럼 일본군 혹은 만주군 소속으로 독립군을 토벌하는 부류
이고, 또 한쪽은 장준하처럼 일본군을 탈영해 독립군에 가담하는 부류였다. 두 부류는
처음에는 같은 일본군에 속했지만 나중에는 정반대의 인생행로를 걸었다.
장준하처럼 일본군에서 도주한 뒤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에 합류한 분이 있었다. 이분이
중국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거리는 오늘날의 자동차 도로를 기준으로 1400킬로미터
에서 1500킬로미터 정도다. 3천 리를 훨씬 넘는 거리를 이동했던 것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가 아니라 '광복군 찾아 삼천리'였다.
그 주인공이 일요일인 13일 오후 3시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배선두 선생. 향년 96세.
경북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1924년에 태어난 고인은 국가보훈처가 1991년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19세 때인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상하이
근처의 난징(남경)에 배치됐다.
이영훈 등의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한국인의 일본군 체험을 칭송하는 대목에서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는 몸과 마음으로 충군애국을 실천하는 병영 생활의 복사판이자,
비국민을 국민으로 포섭·개조하는 국민 만들기의 공장이었습니다"라며 "여기서 이들은
근대사회에 적응하는 시간·신체·언어의 엄격한 규율화와 함께 이른바 '군대적 평등성'을
자기화(내면화)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개성·인격·자의식을 부정하는 군대적 평등성과 불편부당의 능력주의를 실천
하는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거치면서 '정강(精剛)한 제국의 첨병'으로 훈육·단련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일본군 병영이 바람직한 근대적 인간을 생산해내는 좋은
공장이었다는 것이다.
배선두 선생의 입장에서 볼 때, 위의 책에 긍정할 만한 부분이 있다. 지난 1월 22일자
KTV 국민방송 유튜브 채널의 '광복군 총사령부 수호신 배선두 애국지사, 배 지사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꼭 들어야 할 한마디' 편에서
선생은 일본군 체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일본군 분대장이 말도 못 하게 깡패인데, 가죽 허리띠로 때리면 여간
아프거든. 우리 소대 아들(아이들) 전부 죽 세워놓고 막 때려. 일본군대
생활 할 동안에 사람 죽는 건 많이 봤지. 한정 없이 죽었어. 왜놈들이 차
가지고 와서 시체를 양자강에 다 내버리고 ···."
< 반일 종족주의>의 표현처럼 일본군에 배치된 식민지 한국인들은 개성·인격·자의식을
부정당하는 고통과 시련을 감내했다. 이로 인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배선두 선생에게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생겼다. 동료 한국인이 쪽지 하나를 건네준 것이다. 쪽지에는
충칭(중경)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내용과 함께 그곳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일본군 병영 내에 임시정부 밀정이 있었던 것이다.
난징에서 충칭까지 가려면 양자강을 따라 서쪽으로 오랫동안 이동해야 한다. 오늘날의
자동차 속도로도 17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1940년대의 교통 여건 하에서는 용기를
내기 힘든 거리였다.
하지만 배선두 선생은 용기를 내서 탈영을 감행했다. 등 뒤에서는 일본군이 총을 쏘고
정면에서는 중국군이 총격을 가하는 위험을 뚫고, 오로지 광복군에 합류하겠다는 일념
으로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빠져나왔다. 이때가 강제징병 1년 만인 1944년 3월,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가 난징을 탈출해 충칭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17시간 정도가 아니었다. 무려 1년
2개월이나 소요됐다. 도중에 중국인 유격대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양쯔강(양자강)을
따라 하염없이 서쪽으로 이동한 끝에 1945년 4월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하게 됐다. 광복 4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인물이 백범 김구다. 위의 KTV국민방송에 따르면, 68세의
김구가 그에게 건넨 한마디는 이랬다.
"넌 뭐 할래?"
21세의 배선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광복군 대장 하겠습니다!"
스무 한 살 청년의 의기 넘치는 말이었지만, 당시 광복군에서는 이 말이 민감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독자적인 독립군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1942년에
김구와의 좌우합작을 위해 광복군 사령관이 아닌 부사령관에 만족한 채 광복군에 편입
되는 일이 있었다.
통 큰 단결을 위해 대장 직을 포기해준 김원봉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김구는
'광복군 대장 하겠다'는 청년 배선두의 말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김구는 배선두를 따뜻하게 대해주며 "넌 대장감 꼭 됐다"라고 격려했다. 그런 뒤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배 대장"으로 불러줬다고 한다.
김구는 배선두를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도부를 호위하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시켰다. 그래서 배선두는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는 독립군 지도부를 경호하는
책임을 맡게 됐다. 이 상태로 8·15 해방을 맞이했고, 이듬해인 1946년 6월 인천항으로
귀국했다.
귀국할 때 그가 못내 아쉬워했던 것은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는 점이다. 미국이 임시정부의 정부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청년 배선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갔지만
친일파들은 여전히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친일파 경찰들이)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해서, 해방되고 나서 주민들이 가서 때려
죽이려고 가니 어딜 도망가고 없어. 이후 (그 경찰이) 의성 경찰 수사과장이 돼 있었어요.
(그 경찰의) 친인척, 가까운 사람 전부 호의호식하고 ···."
자기처럼 독립운동 한 사람이 아닌 일제에 빌붙던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선두 선생은 편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그가 일제 치하에서 생활한 시간은 21년이다.
해방 뒤 친일파의 득세를 지켜보며 편치 않게 산 시간은 무려 75년이다. 96년 생애의
4분의 3을 친일파의 득세 때문에 불편하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눈을 감은 뒤로도 그 불편을 계속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그의 묘역이
준비된 국립대전현충원에 항일투사 잡던 친일파 백선엽이 얼마 전 묻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저세상에 가서도 친일파로 인해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친일청산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의 속앓이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고 배선두 선생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고인의 빈소는 의성중부농협
장례식장에 차려져 있고, 발인은 15일 오전에 하게 된다. 장지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이다.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