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결단하여 통치권 일체를 영구히 일본에 양여.
소란 일으키지 말고 일본에 복종하여 행복을 받으라"
황제일가와 매국노들은 일본 돈 받아 영화를 누리다
110년전 경술국치? 망국은 그 5년전 을사조약때 끝났다
한국의 8월은 광복(건국)의 달이자 망국의 달이다.
올해 8월15일은 자유혁명가 이승만이 스탈린과 싸워 이기고 5천년 민족사상 최초의 자유민주 공화국을 세운 72주년, 8월29일은 조선왕국(후에 대한제국)이 517년 국가 통치권을 일본에 ’스스로 양여‘한 국치(國恥) 110주년이다. ’스스로 양여‘란 순종황제가 그날 발표한 성명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2천만 한국 백성을 한 순간에 ’친일파‘로 만든 ’어명‘이었다.
국가자살의 유서 같은 그 황제의 놀라운 ’어명‘을 다시 보자.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황제 조서, 밑줄은 필자)
순종의 조서발표 일주일전 8월22일 이미 양국은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 내용을 보면 ”망해도 더럽게 망했다“는 누군가의 탄식이 누구 입에게서나 터져 나올 것 같다.
1조)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 양여함.
2조) 일본 황제는 ’양여‘를 받아 한국을 일본에 병합함을 수락함.
3조) 한국 황제 직계와 후궁 가족 등의 명예와 생계를 보장하는 세비를 지급함.
4조) 여타 황족들에게도 명예와 생계 보장 세비를 지급함.
5조) 한일병합 등에 공을 세운 한국인들에게 명예작위와 은급(恩給)을 지급함.
6조) 장차 실시할 일본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들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함.
7조)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중 자격 있는 자는 일본 관리에 등용함.
8조) 본 조약은 양국황제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반포일부터 시행함.
참으로 희한한 ’국가 매매계약서‘--무엇을 받고 나라와 백성을 통째 팔아먹었나.
그리하여 황제 일족은 일제 35년 내내 식민지체제에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이왕가’는 일왕 다음가는 부자‘였다하며, ‘이씨 왕실’의 사직(社稷)은 국가멸망과 상관없이 일제 패망 1945년까지 일본 왕이 해마다 세비를 주어 유지했다. 황족과 함께 매국 공신들은 백작 후작 남작 등의 작위와 일본왕의 은급을 매년 받았으며 유림들도 일제가 만든 경학원(經學院) 대제학을 한번 해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순종이 염려하였던 ‘소란’도 없었다. 매천 황현 등 몇몇 선비가 자결했을 뿐, 을사늑약(1905)때의 민영환 같은 고관의 자결도 없었고, 의병은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씨조차 마른지 오래였다.. 을사 이후 5년간 조선은 완전히 일본 것이 되었기에, ‘병합 선언’이란 진작 시체가 된 나라를 관속에 넣고 마지막 못을 박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로써 ‘이씨 왕가’의 생명부지와 부귀영화를 담보로 한국인들은 어명에 따라 ”일본에 복종하여 행복을 찾아야“하는 망국인신세로 전락, 곧 ‘전국민 친일파’의 탄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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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처럼 비겁한 왕은 동서 역사에 처음 본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미국공사 알렌이 남긴 기록이다. 경복궁 잠자리에 쳐들어온 일본 살인집단에 왕비가 난자당하자 혼비백산한 고종은 미국, 영국, 독일 등 공사관에 ‘망명’을 애걸하였다고 한다. 일곱 차례나 거절당하던 때, 한반도를 노리던 러시아가 고종 일가를 한밤중에 공사관으로 끌어들였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그후 러일전쟁 날 때까지 10년간은 러시아 시대, 니콜라이 황제 요구대로 ‘양여’ 하여 압록강 하구 용암포는 ‘니콜라이 항’이 되었다. 부산 영도와 인천 앞바다 섬 등을 요구한 러시아와 조선의 비밀계약 내용을 폭로하여 저지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23세 청년은 자신이 창간한 신문에 연사흘 대대적으로 보도, 국제필화사건을 일으키며 거리투쟁을 벌여 고종과 러시아가 굴복하는 결과를 얻어낸 것은 이승만 독립운동의 첫 승리였다.
아관파전 10년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의 중재를 맡은 미국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수용하였다. 1882년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깬 D. 루즈벨트 대통령은 뒷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적에게 주먹질 한번 못하는 나약한 자는 하늘도 돕지 못한다.“ 조선을 무시한 자기변명이자, 약육강식의 식민지 쟁탈전시대에 전쟁은커녕 항일 선언조차 못하는 조선왕 고종을 한껏 멸시한 모욕이다. 고종은 끝내 일본을 향해 총 한방 쏘지 못한 채 ”종묘사직의 안녕“만을 간청하였고. 그 아들 황제가 마침내 나라를 내주고 만백성을 ‘친일파’로 만드는 ‘어명’을 내린 것이었다. 일본의 무력 협박에 강요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맞지만 틀렸다. 그래서 황제의 죄를 백성들에게 덮어씌우고 매국의 진실을 숨겨왔던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소련 스탈린은 전쟁중 점령한 국가들을 동시 다발로 공산화하였다. 독일이 지배했던 지역에서는 ‘히틀러 부역자” ’친나치 분자‘란 낙인을 찍어 반공세력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선점한 북한에서는 반공세력을 ’친일파‘로 몰아 가차없이 제거하였다. 아무리 지독한 친일분자라도 공산정권에 협력하면 애국자로 둔갑시켜 써먹었다. 북한 초대내각에 친일분자가 왜 그리도 많은지 알려진 대로이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일찌감치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옳고 그른 것. 1923년 발표논문)을 갈파한 세계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3.1운동후 출범한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때, 소련의 레닌이 임정을 공산화하려 덤볐기 때문이다. 임정 총리 이동휘 등에게 거액의 공작금을 주어 고려 공산당을 만들고 김구까지 포섭하려 하였다.(백범일지).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나섰을 때 마침내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을 추방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진작부터 이승만과 대립각을 세웠던 서북파(평안도)가 합세, 이승만 탄핵(1925)에 앞장섰으며 민주공화제 대한민국 정부는 소비에트 체제로 전복된다.
“쓸모있는 바보들”- 레닌과 스탈린이 즐겨 이용한 공산화 앞잡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헌법을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로 바꾸고 첫 주석에 김구가 취임한다.(김구는 공산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해방후 돌아온 독립운동세력들은 우왕좌왕, 정작 건국단계에서 사분오열 되었다.
조국 분단의 원흉 스탈린과 싸우고 스탈린에 속은 미국과 싸운 이승만은 끝내 혼자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한다. 혼자의 힘이라 함은 형제 같은 동지 김구가 막판에 돌변, 김일성과 연립정권 세워 통일하자며 총선도 건국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김구를 따랐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찌되어 있을까.
8년전 이명박 정권에서 박근혜정권 초까지, KBS는 난데없이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백년전쟁’이란 기획물을 55회나 방송한다. 잘 알려진 내용은 “이승만-박정희는 친일파, 미국 앞잡이, 매국노‘ 등 중상모략 일색이었다. 왜 ’백년 전쟁‘일까? 레닌의 임정 공산화 시작이 백년전 일이다. 백년이 되도록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키지 못한 것은 이승만-박정희 때문이기에 백년 후에도 공산화전쟁을 계속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공영방송 횡포였다.
올해 8월 들어서도 이승만 공격이 연속 나왔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어느 장관후보자가 ”이승만은 국부가 될 수 없고 김구가 국부였으면 좋겠다“고 했던가. 이어 72주년 광복절 행사에선 광복회장이란 사람이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한 친일파“란 막말을 퍼부었다. 그는 과거에도 ’이승만은 역적, 백선엽은 사형감‘이라고 주장했다는 기록도 보도되었다.
대통령이 앉아있는 앞에서 건국자를 반역자로 모략하는 행사가 건국기념식인가? 그런 나라는 이미 ’딴 나라‘ 아닌가.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연설탁자엔 ’대한민국‘ 아닌 ’우리나라‘ 간판을 붙여놓았다. 그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는 탈북자들은, 평양엔 ’우리나라 우리민족끼리‘ 구호가 많다며 몸서리를 쳤다.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예언대로 되어버렸다.
6.25전쟁때 ’분단 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승만은 수없이 경고하였다.
”북한은 이미 중공(중국공산당)의 식민지다. 북진통일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도 위험하다. 중국 대륙을 공산당이 지배하는 한, 미국도 세계도 평화는 요원하다. 공산주의로부터 대륙을 탈환하는 해방전쟁은 자유세계의 의무이다.“ 미국 의회연설에서도 북진통일을 신앙처럼 부르짖었으나 미국은 외면하였고, 그후 닉슨독트린은 중공을 전체주의 괴물로 키워주었다.
67년전 이승만의 요구를 버렸던 미국은 이제 뒤늦게 ’미-중 냉전‘에 돌입하였지만, ’조-중 핵동맹‘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700년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한미동맹을 구축한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친일파‘보다 더 무서운 ’친북파=친중파‘에 목을 잡혀 또다시 공산대륙의 핵 노예로 끌려가는 중이다.
어느 날 갑자기 순종 같은 항복선언이 나올 것인가? 친일파가 ’스스로 결단하여‘ 나라를 바쳤듯이 친북-친중파도 스스로 결단하여 대한민국을 전체주의에 바치는 ‘제2의 순종’으로 커밍아웃 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승만은 살아있다. 5천만 국민은 구한말 백성도 아니고 북한의 노예도 아니다. 백년을 내다본 이승만의 전략전술이 한미동맹군을 이끌고, 그가 일찌기 예언했던 미-중 재대결을 지휘하는 모습이 저기 보이지 않는가.
◎ 데일리뉴스 안보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