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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위키트리] 독립운동의 성지 밀양에서 의열단 재조명 학술대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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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21 13:39 조회6,3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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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100주년기념으로 의열단 창단 일인 11월10일 개최

- 의열단 김상윤 최수봉 의사 반일투쟁과 밀양지역 독립운동 등 주제발표

'독립운동의 성지' 경남 밀양에서 의열단의 의열투쟁과 밀양지역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더욱이 이 대회는 의열단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100주년을 기념으로 의열단

창단일에 열려 그 의미를 더해 준다.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소장 윤일선)는 오는 11월10일 오후 2시 경남 밀양시

밀양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서 ‘밀양독립운동사 공훈선양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와 밀양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 대회는 국가보훈처

와 밀양시가 주최한다.

모두 3부로 나누어서 진행되는 이 대회는 2부에서 김영범 대구대 교수가 좌장으로

주제발표를 이어간다.


먼저 동아대 전성현 교수가 ‘밀양지역 일제탄압기구와 투탄의거’를 주제로 발표하고,

이어서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  ‘의열단 창단과정과 김상윤 의사의

반일 투쟁’이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마지막으로 이준설 학예연구사가 ‘밀양지역 의열투쟁 개관’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후 종합토론을 마친 뒤 폐회한다.


윤일선 소장은 초대의 말씀에서 “말양은 의열투쟁의 성지로 항일운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의열단의 창단일인 11월10일을 맞이해 밀양경찰서 투탄의

거의 주역인 김상윤ㆍ최수봉 의사를 비롯한 의열투쟁에 헌신하신 분들을 재조명

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대회개최 의미를 설명했다.


초산 김상윤선생의 유족 대표 김기봉 전 광복회 서울 강북구 지회장은 “ 이번 학술

대회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밀양지역의 독립운동과 의열단의 활약을 재조명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는 1920년 12월27일 월요일 아침 의열단 단원이었던 최수봉

의사가 비밀리에 폭탄을 숨긴 뒤 밀양경찰서에 투척한 거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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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의사는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서장실에서 와타나베(度邊末次郞)가 순사 등 19명을

불러놓고 특별 순시를 할 때 창밖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이 중 한 발의 수류탄은 순사

부장 조선인 남경오(南慶吾)에게 맞았으나 불발이었고, 한발의 폭탄은 경찰서 본관의

사무기구를 파괴했다.


최수봉은 도주하면서 근처의 지인인 황석(黃錫)의 집에 숨어있다가 25 cm 단도를

꺼내 자결하려고 배를 긋고 다시 15cm를 그었으나 미수에 그치고 일본군에 체포

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된 뒤 치료 후 1921년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2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 경성고법에서 5월 23일에 사형이 선고되어 그해

1921년 7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거사 당시 최수봉은 나이 24세로서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 거주하는 초산 김상윤(金相潤)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고 승낙하였다.


이에 김상윤은 최수봉을 대구부(大邱府) 근처에 거주하는 김원석(金元錫)에게 소개

하였다. 김원석은 최수봉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하여 밀양경찰서를 파괴

하고 일본경관을 살해할 것을 지시, 12월 26일 그에게 폭탄 2개를 줌으로써 이튿날

거사를 결행했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에서 보듯이 1920년대 독립운동은 무력을 앞세우며 더

비밀리에 행해졌는데, 당시 일본이 가장 두려워 했던 단체가 바로 의열단이다.

의열단이 용맹을 떨치며 독립운동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조직을 관리하고 독립운동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 초산 김상윤 의사

때문이었다.

    

의열단 창립 단원인 김상윤 의사는 의열단의 모든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을 지휘,

대외 교섭, 자금 관리를 총괄하는 의열단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5인 참모부의 일원

이었다. 

    

1897년 9월 12일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난 김상윤

의사는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을강 전홍표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사립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고는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스무 살의 김상윤 선생은 투쟁 방안을 모색하며 만주로 망명의 길을 떠

중국 길림에 있는 신흥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해 11월 10일. 길림시 파호문 밖 57번지에서 김원봉·윤세주·한봉근·한봉인·

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난

13명의 청년들이 항일 무력투쟁단체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熱)을 취해 단체 이름을 의열단이라 명명했다. 

    

그는 1919년 의열단을 창단한 후 7년 동안 16번의 폭탄 투척으로 항일 투쟁을

벌였다.


◎ 위키트리 최학봉 기자 hb7070@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