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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연합뉴스] 탄생 140주년 맞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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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07 11:45 조회4,2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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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밖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로법미(英露法美·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로법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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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중국 뤼순(旅順)감옥에 갇혀 있던 1931년 6월 10일부터 매일 103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사'(朝鮮史)의 첫 대목이다. 신채호는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서술하겠다고 마음먹고 틈틈이 원고를 집필했으나 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만 완성한 상태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저술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고 부른다.

8일은 신채호 탄생 140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는 필봉으로 일제에 항거한 언론인이자 한민족의 기상을 일깨운 역사학자였고, 조국 광복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한 양반 출신인데도 끊임없는 자아 혁신으로 진보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였으며, 문필가면서도 실천하는 행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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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번지(단재로 229번길 47)이다. 몇 해 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진외가 마을로 이사해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0세에 자치통감을 해독하고 14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자 학부대신을 지낸 친척 신기선이 자신의 서재에 있는 책을 모두 읽도록 하고 1898년 성균관 경학과 입학을 주선했다.

성균관 시절 신채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3년 과정을 마친 뒤에는 청주로 낙향해 문동학교와 산동학당을 설립하고 교육계몽활동을 벌였다. 1905년에는 위암 장지연의 초청으로 상경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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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일합방론자들을 비판하는 한편 우리 역사의 영웅들을 발굴해 신문에 소개했다. 자신의 은인인 신기선이 송병준·조중응과 함께 '일본의 3대 충노(忠奴)'라며 질타하는가 하면 중국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하고 '을지문덕', '성웅 이순신', '동국거걸 최도통전'(최영 전기) 등을 연재했다.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해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망국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신민회원들과 함께 1910년 5월 평양 오산학교에 들렀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오산학교에서 만난 12살 아래 이광수는 "오직 비범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말 속에는 추상같은 기개가 들어 있었다"고 그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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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첫 해외 활동무대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대동공보 논설을 집필하다가 대양보와 권업신문 주필을 맡았다.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6개월간 머문 뒤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고조선·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하며 모은 자료를 토대로 '조선상고사'를 집필했다. 동아일보 기고문에서는 묘청 주도로 단행된 고려의 서경(西京·평양) 천도를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평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민족주의자로 출발했으나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며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민중혁명론을 받아들였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감격했다가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에는 "평화운동이 다 뭐 하자는 거요?"라며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임시정부 결성에도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이 모두 유약하다며 결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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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민중의 혁명 역량에 토대를 둔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이끄는 김원봉의 요청을 받고 1923년 1월 쓴 6천400자 분량의 '조선혁명선언'에 이런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전략)…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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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는 중국·일본·베트남·인도·대만 등 6개국 대표가 베이징에서 결성한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이들은 위조 어음을 만들어 폭탄공장을 짓기로 했다. 신채호는 어음을 찾으러 대만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건강이 나빠졌다. 보다 못한 뤼순감옥 관리가 서울의 친척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병보석으로 출감할 것을 권유했으나 "친일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평소 주변 사람에게 "내가 죽으면 시체를 왜놈들이 밟지 못하도록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말했으나 지인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모국으로 옮겨 그가 자란 청주 귀래리에 안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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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한민국은 신채호가 태어나던 140년 전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위협과 압력은 그에 못지않게 날카롭고 거세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신채호의 애국정신이 절실하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익혀 바로 알게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우리가 후손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