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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겨레신문] 서거 70주년, 김규식 선생의 길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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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10 10:15 조회3,9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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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2월10일은 우사 김규식 선생이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에서 서거하신 지 70주년이 된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민족통일을 염원했던 선생은 간병인조차 자리를 뜬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필자는 2000년 초에 몇 차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방문해 선생의 묘비 앞에서 망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린 적이 있다. 서거 70주년을 맞아 먼저 납북가족 및 이산가족의 아픔에 깊은 위로를 드린다. 


우사 선생은 일찍이 미국 로어노크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그 학자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1904년 귀국해 와이엠시에이(YMCA) 등에서 활동하면서 1910년 12월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받았다. 1913년 11월, 그는 영문학자로서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망명길에 오른다. 개인적인 영달 대신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독립운동의 가시밭길을 선택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1919년 독립운동계를 대표하여 프랑스 파리에 파견돼 독립청원서를 제출했고 임정 외무총장에 임명되는 등 그의 독립운동은 외교 분야에서 돋보였다. 그는 1910년대에 이미 몽골지역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했을 정도로 군사투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민족주의 좌파의 김두봉·김원봉 등과 관련을 맺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폭을 넓혔다. 임정이 다당제를 채택하자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임정의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와 협력했다. 선생은 독립운동에서 좌우세력의 협조가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선생이 해방 정국에서 보인 모습도 민족문제를 고민하는 후진들에게 귀감이 된다. 신탁통치 문제가 터졌을 때, 선생은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탁치 문제는 그 후 민족적 대의에 따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되자, 7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여운형·안재홍·홍명희 등과 함께 먼저 민족대단결을 도모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정부 수립만이 민족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았다. 해방 정국에서 우사와 몽양은 중도 좌우파를 이끌며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선생은 미군정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통일의 길임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입법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48년 2월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안이 통과되자, 분단을 막고 민족통일을 달성하려는 대의에 입각하여 백범과 함께 북한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 실천했다. 이렇듯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통일을 추구하다가 6·25 때 피난하지 못한 채 납북되었다.

 

선생 가신 지 70년. 기독교 지도자로서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것은 오늘날 기독교계에 큰 경종을 울린다. 1989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선생에게는 국가적 의전도 변변찮아 현충원에 위패를 모신 정도다. 해방 공간에서 선생은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와 함께 3거두의 한분으로 존경받았지만, 그런 지도자에 상응하는 예우는커녕 기념사업조차 변변찮다.

 

그래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는 70주기를 맞아 선생의 민족화해 이념을 기려, 납북 때까지 거주했고 남북요인회담의 산실이었던 삼청장을 선생의 독립·화해·통일 정신을 전수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삼청장은 국가적 기념물로 보존되는 김구의 경교장, 이승만의 이화장과는 달리, 현재 청와대 부속건물로 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또 하나, 정부는 선생의 거주·활동공간이었던 삼청장 주변의 동십자각~삼청터널에 이르는 길을 ‘우사로’(尤史路)로 명명해주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의 신념인 남북좌우 화해야말로 통일을 향한 선결 과제임을 확인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 출처 : 한겨레신문 - 이만열 ㅣ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