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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 제45주기 추모재"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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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4-04-17 10:12 조회8,8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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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 제45주기 추모재' 열려

승려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하며 항일독립투쟁
14.04.11 17:24l최종 업데이트 14.04.11 17:49l김경준(kia0917)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역임했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태허스님)의 서거 제45주기 추모재가 11월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 주최로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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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45주기 추모재 운암 김성숙 선생 45주기 추모재 식장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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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모식은 승려였던 김성숙 선생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불교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안중현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과 대한불교조계종 호계원장인 일면스님이 각각 정부와 불교계를 대표해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였고, 광복회 회원들과 상산김씨 대종회, 유가족, 학생, 일반 추모객들이 참석해 선생의 뜻을 기렸다.

추모재는 윤원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약력보고로 시작되어, 내빈 추도사와 추모의식(작법), 추모가 합창,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감사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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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객들 운암 김성숙 선생 45주기 추모재에 참석한 추모객들이 고인을 기리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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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늘 이 자리에는 독립운동가 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씨가 참석해 선생께 바치는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그는 "어릴 적 먼 발치에서 선생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맞서 싸우셨고, 해방 후에는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맞서 싸운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이제는 우리가 선생의 못 다 이룬 소원을 이뤄드리고자 하니, 부디 편히 영면하시길 바란다"고 하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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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씨 독립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가 상념에 잠긴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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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관에서의 실내행사가 끝난 뒤에는 임시정부요인 묘역 내 김성숙 선생의 묘로 이동해 다함께 참배를 드리는 것으로 추모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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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추모객의 큰 절 운암 김성숙 선생 45주기 추모재에서 한 추모객이 선생의 영정 앞에서 큰 절을 올리고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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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출생으로 어릴 적에 '대한독립학교'를 다니며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18년에는 경기도 용문사에서 출가하여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이때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하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승려들과 독립문서를 만들어 살포하다가 일경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북경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 등 학문에 정진하면서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도 가담해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승려 신분임에도 왕성하게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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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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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위한 역량을 모으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단체들을 모두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혁명운동>, <민족해방>, <민족전선>, <의용대통신> 등 각종 기관지를 통한 언론투쟁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국이 해방되는 순간까지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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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요인 2진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2진이 환국할 당시의 사진 (두 번째 줄 네 번째 인물이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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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권에 맞서 조봉암의 진보당 창당에 관여하는 등,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서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0개월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옥고를 치른 뒤에도, 독재정권에 맞서 야당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신민당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야당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9년 4월 12일 72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정부는 1982년에서야 고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한 바 있고, 2004년에서야 비로소 선생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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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선생 묘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위치한 운암 김성숙 선생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