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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국일보] 의열단, 그리고 잊힌 여성무장투쟁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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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1-25 10:54 조회4,2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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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영화 '암살'의 유명한 대사이다. 이 대사 덕분에 의열단장 김원봉이 밀양사람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렇다. 최고의 항일 비밀무장투쟁 조직이었던 의열단은 밀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의열단장인 김원봉(1898-1958)만이 아니라 ‘의열단의 영혼’이란 평을 듣는 윤세주(1901-1942), 김상윤, 함봉근 등이 밀양출신이다.

밀양에 도착해 김원봉과 의열단을 기념하는 의열 기념관을 찾았다. 번듯한 3층 빌딩을 보고 있자니 감개가 무량했다. 김원봉은 밀양에서조차도 오랫동안 금기였다. 그는 최고의 독립투사였지만 ‘좌파’라는 이유로 해방 후 일제 강점기에 독립투사들을 고문한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고 남북 협상 차 북으로 넘어간 뒤 그곳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살'이 대히트를 치자, 밀양시가 부랴부랴 그의 생가를 구입해 기념관을 지어 2018년 개장했다. 영화 한 편이 그를 ‘복권’시켜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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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 기념관 바로 옆에는 옆집에 살았고 아우처럼 지낸 윤세주의 생가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앞에는 둘이 어린 나이에도 독립운동을 위해 연무단이란 비밀결사를 만들어 체력단련을 위해 산악구보를 하고 내려와 겨울에도 얼음목욕을 했던 개천이 흐르고 있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이 지역 3·1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이 실패하자 만주로 가 3·1운동의 비폭력노선의 한계를 넘어서 폭력투쟁을 추구하는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1919년 11월에 만들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경찰서 등 5개 적의 기관을 파괴하고 총독부관리, 군 수뇌부, 거물 친일파, 밀정 등 7악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의열단은 1920년 부산경찰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시작으로 20년대 후반까지 많은 일본기관과 관리들을 공격, 독립운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의열단원으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은 수백 명에 달하며,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민족시인 이육사도 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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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실행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함’으로 시작하여 ‘배반하는 자는 처형함’으로 끝나는, 기념관에 전시된 의열단의 10대 맹세는 언제 보아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특히 조선독립만이 아니라 세계의 평등을 내건 것이 다시 한 번 감동스럽다.

놀라운 것은 의열단의 목표와 강령이다. 여러 번 본 10대 맹세와 달리, 목표와 강령은 의열기념관에서 처음 접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급진적이었다. 이들이 꿈꾼 최고이상은 1. 왜놈을 몰아낸다, 2. 조국을 되찾는다, 3. 계급을 없앤다, 4. 토지를 고루 나눈다는 네 가지였다. 20대 강령 역시 일제 타파만이 아니라 봉건제 타파, 보통선거권, 사상·표현·결사·언론의 절대자유, 의무교육, 민중경찰 조직과 민중무장화, 지방자치, 여성의 동등한 정치, 경제, 사회권, 일제와 매국노 재산 몰수, 대지주 농지 몰수, 기간산업 등 국유화, 누진소득세, 빈농과 노동자 복지 등 급진적이다. 한 마디로, 의열단은 투쟁방식만이 아니라 투쟁목표 역시 아주 급진적인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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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과 윤세주는 1929년 말 독립운동은 대중과 같이 하는 투쟁이어야 하는데 의열단은 전위적 조직으로 한계가 있다며 의열단을 해체, 좌우합작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전환시켰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독립군인 조선의용대를 결성해,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투쟁에서 대장은 항상 김원봉이었지만, 세부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일을 추진한 것은 윤세주여서, 사람들은 그를 ‘의열단의 영혼’, ‘민족혁명당의 영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 불렀다. 윤세주는 일본군과의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김원봉은 살아남아 귀국했지만 친일경찰에게 고문을 당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넘어갔다. 그는 그 곳에 남아 요직을 하기도 했지만 1950년대 말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 북에서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북에 남았다는 이유로 그는 영화 '암살' 전까지는 소수 연구자들 이외에는 대중적으로 잊혀진, 금단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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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인기 속에서 2015년 광복절에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김원봉을 높이 평가하며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국군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문대통령의 2015년 표현을 빌리자면, “일제 경찰이 백범 김구선생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항일투쟁의 치열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월북자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윤세주는 ‘다행히’ 해방 전 목숨을 잃은 덕분에 김원봉과 달리 뒤늦게나마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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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이자 김원봉의 부인으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가 부상을 당해 사망한 박차정 의사의 동상. 고향인

부산동래 작은 공원 구석에 세워져있다.



김원봉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나는 부산으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나와 첫 신호등에서 유턴을 해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향하면 진입로 오른쪽으로 만남의 광장과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버려진 듯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한 구석에 한 여자의 동상이 서있다. 이에 다가가자 깜짝 놀랐다. 잘못된, 남성주의적인 선입견이지만, 이 여성이 군복을 입고 장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의열단원이자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의사(1910-1944)이다. 그리 멀지 않은 동래온천 근처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박 의사는 동래일신여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과 관련 옥고를 치렀다.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원으로 활동 중 김원봉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조선의용대 부녀단장 등으로 무장투쟁을 벌리다가 태항산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34살에 목숨을 잃은 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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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안옥윤의 모델인 '독립운동의 어머니' 남자현 지사상. 여성들도 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부산에서 다시 3시간을 달려 경북의 산골인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도착하면 또 다른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 지사(1872-1933)의 동상이다.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피에 받아쓴 대한여자독립원/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고정희 시인이 이처럼 노래한 무명지는 바로 남자현의 무명지이다. 남 지사가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해, 그리고 외국사절들에게 독립을 호소하는 혈서를 쓰기 위해,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자른 것은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델이 바로 남 지사다. 남편이 한말 의병운동으로 죽자 유복자를 혼자 키우다가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했다. 1924년 총독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1933년 주 만주 일본대사를 암살하기로 하고 연락과 무기 운반 임무를 띠고 걸인 노파 복장으로 하얼빈에 들어갔다가 체포됐다. 단식투쟁 끝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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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반 독립운동은 말 할 것도 없고 의열단과 무장투쟁에서 있어서도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여성독립유공자는 2018년 말 현재 357명으로 전체(1만5,180명)의 2.4%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동상이 서 있는 사람은 유관순을 제외하면 박차정, 남자현, 김마리아, 윤희순 등 4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독립운동기념에 있어서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박차정 의사의 동상을 쳐다보고 있자 박차정이 민족혁명당의 핵심으로 남경시절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 여사와 함께 결성한 남경부녀회의 선언문이 떠올랐다. 그 선언문은 독립운동에서의 여성의 역할만이 아니라 여성해방의 사상까지도 보여주고 있는 선진적인 문건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박차정 의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됐지만,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이루었으며, 우리 부녀들은 철저한 해방을 얻었는가.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