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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동아일보]다시 되새기는 피우정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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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5-08-10 10:27 조회9,27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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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다시 되새기는 피우정 정신

 
1945년 9월 2일,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지 보름가량 지난 날. 일본 도쿄 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갑판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전함에는 4년 전 진주만이 공습당했을 때 백악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가 펄럭였다. 매슈 페리 제독이 문호 개방을 요구할 때 타고 온 흑선에서 나부끼던 성조기도 내걸렸다. 별이 31개 그려진 이 성조기는 92년 만에 다시 일본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판 위의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상은 왼손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연미복 차림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주중 일본 공사이던 1932년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중상을 입고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비록 한국이 항복을 받는 9개 연합국에 들진 못했지만 그는 한국이 일제에 입힌 충격의 상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휴가 중 집어든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은 독립투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쓰러져 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일으켜 세운 구원의 손길이었다. 사실상 김구 혼자서 지키고 있던 임정은 훙커우 의거로 장제스(蔣介石) 중국 주석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 나서줬다.

독립투사들은 입에 풀칠하기에도 힘든 가난 속에서 일제에 맞섰다. 김좌진은 후 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조밥을 반찬도 없이 부하들과 나눠 먹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나혜국은 앉은뱅이 딸과 함께 단칸방에서 중국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형제들의 만석지기 살림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간 이회영 집안이 굶기를 밥 먹듯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나는 길에 이 지독한 굶주림을 목격한 같은 무정부주의 계열의 정현섭이 남의 돈을 털어 보태줄 정도였다. 그나마 살아남았다면 조국의 광복이라도 봤지만 중국 이곳저곳에서 스러져 간 독립투사들은 혼이나마 고향 땅을 밟았을까.

광복 뒤에도 많은 독립투사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던 김성숙은 71세로 타계하기 3년 전인 1966년에야 11평짜리 집 한 채를 얻어 셋방살이를 겨우 면했다. ‘비나 피하라’고 아는 이들이 마련해준 집의 문 위에 ‘피우정(避雨亭)’ 현판을 걸었다. 퇴원비가 없어 숨진 지 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그였다.
 
김성숙은 ‘그렇게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게 뭐냐’며 친지들이 푸념하자 이렇게 타일렀다.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야.” 역시 임정 국무위원이었던 장건상은 “그날그날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살아간들 어떠랴. 민족이나 앞날이 밝았으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이들의 조국 사랑을 광복절 하루에만 되새기는 것은 후손으로서 아주 송구한 일이다.
 
임정은 발족하면서부터 기호파니 서북파니 하면서 지방색을 앞세워 다퉜다. 공화주의에서부터 공산주의에 이르는 이념적 갈등과 투쟁노선 차이도 서로 등을 돌리게 했다. 임정을 바라보고 찾아온 젊은이들이 고개를 흔들며 발길을 돌릴 지경이었다. 항일운동세력 내부에서는 원수로 변한 상대 진영 구성원들을 테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임정에서 시작된 반목은 뿌리가 깊어 좌우합작 노력에도 불구하고 풀어지지 않았고 광복 이후에까지 이어졌다.

충칭(重慶) 시절 중국인들은 임정 인사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기가 막힌 보배들이다. 금강석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열되어 있느냐?” 지금의 우리에게 던진 질문인 듯해 말문이 막힌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