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아들 두젠씨가 전한 혁명가 어머니 두쥔후이…광복절에 건국훈장
"한중 공동투쟁은 역사적필연"
(베이징=연합뉴스) 홍제성 특파원 = "어머니는 한중 간의 공동투쟁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한국 정부가 건국훈장으로 어머니의 생전 공적을 인정해 주신 데 대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1898∼1969) 선생의 아들 두젠(杜鍵·83)씨는 아버지에 이어 중국인 어머니 두쥔후이(杜君慧·1904∼1981) 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제71회 광복절에 건국훈장을 받은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두젠씨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벌이던 운암 선생이 당시 광저우(廣州)에서 만난 여성혁명가 두쥔후이 선생과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 중 둘째로, 중국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을 지낸 유명한 미술가다.
연합뉴스는 지난 18일 베이징(北京) 외곽 창핑(昌平)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겸한 자택에서 인터뷰를 갖고 독립운동가, 혁명가로서 살아간 부모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의 기억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광저우의 중산(中山)대학에 다니던 어머니가 이 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던 아버지로부터 일본어를 배우면서 혁명사상 등에 큰 영향을 받아 혁명에 투신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부모는 사상적 동지이자 부부로서 1930년대 이후 상하이(上海), 충칭(重慶) 등에서 독립운동과 항일투쟁, 저술 활동 등을 펼쳐나갔다.
"10살 남짓으로 어려서 당시에는 잘 이해 못 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안에서 토론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항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임시정부의 현안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기억합니다."
운암 선생은 1937년 중국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 항일운동에 앞장서다 1942년 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임명돼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선전사업을 총괄하는 선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란 이름으로 '아리랑'에 등장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어머니는 당시 '부녀구국회'의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중국 부녀(여성)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면서 중국과 당시 조선은 공동 운명이란 생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도 헌신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조선의 일과 중국의 일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동북아 지역의 조선민족(한민족)과 중화민족은 공동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한국)과 중국이 결합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같은 한중 연대의 신념으로 1942년 충칭(重慶)에서 한중문화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이듬해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도 활동했다.
두쥔후이 선생은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잡지 '독립' 기고문에서 '조선의 딸'을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 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늘 생각하고 있다"며 절절한 독립의 염원을 토로한 바 있다.
이같은 공을 인정해 국가보훈처는 올해 광복절 기념식을 통해 두쥔후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부부가 함께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경우도 드물지만, 외국인이 포함된 경우는 더 드문 것으로 알려졌다.
두젠씨는 어머니가 '트로츠키파'와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은 김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1936년부터 10년간 공산당 당적을 박탈당하는 등 큰 시련도 겪었다고 했다.
10년간 박탈된 당적은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전 총리의 부인인 덩잉차오(鄧潁超·1904∼1992) 전 전국 정협 주석의 도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는 1945년 광복을 맞아 아버지가 귀국하면서 아버지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은 이야기도 솔직하게 전해줬다.
아버지가 중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이미 결혼해 부인과 자식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두젠씨 형제들은 한국에 따라가지 않고 중국에 남게 됐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며칠 동안 썼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인천으로 건너가 배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아버지를 수소문했던 기억도 들려줬다.
"배에서 만난 분에게 저도 한국사람이고 아버지가 김성숙이라고 했더니 그분이 아버지를 안다며 모시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만나기 힘든 상황이란 것을 알게 됐는데 도와주신 분이 나중에 알고 보니 작곡가 정율성의 큰 조카쯤 되는 분이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한국전쟁)이 터지며 동북아 정세가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면서 결국 그에게 아버지와 함께 사는 기회는 더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 속에 "언젠가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살 날이 있을 테니 그때까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잘 지내라"는 당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귀국 후 이승만 정권에 맞서 야당에서 활동하면서 수차례 옥고를 치르는 등 핍박을 받은 사실에 매우 가슴 아파하면서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도 드러냈다.
"아버지가 생전에 병원에서 한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려고 했다면 큰돈을 벌었겠지만 그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독립운동과 신념을 지키는 것)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아버지는 실제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에 있는 운암 선생의 큰 딸인 이복누이 등의 노력으로 한국의 가족들과 연락이 닿게 됐고 운암의 외손자인 민성진 회장이 이끄는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와도 자주 교류하며 지낸다고 소개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를 둔 그에게 최근 한중 관계의 가장 민감한 갈등현안인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각국의 이익이 부딪치는 매우 복잡한 문제"라며 "각국의 이익은 존중해야 하지만, 모두가 최대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문제는 무력이 아닌 정치적으로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북한의 이익도 보호하지 못하고 손실만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피력한 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정책에 대해 "매우 위험하며 북한 민중에게 큰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TV 중계를 볼 때 다른 나라와 한국이 경기하면 꼭 한국팀을 응원한다"며 한국이 더 발전하고 한중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기를 바란다는 소망도 전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어머니는 신념과 이상에 충실해 항일운동과 한중 연대를 실천하셨지, 보답이나 보상을 바란 것은 전혀 아니었을 것"이라면서도 "하늘에서 훈장 서훈 소식을 들으신다면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js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