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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겨레21] 자율성 있어야 민주주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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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7-02-01 10:04 조회11,0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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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 있어야 민주주의 가능하다

진정한 사회변혁 모색한 김성숙의 민족해방 의식


박근혜 정권이 벌인 어이없는 난동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황당한 하나가 건국절 논란이었다. 느닷없이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했다’는 주장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3·1운동,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더불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 내용이 새삼 주목받았다.

‘법통’이란 말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임시정부 정신을 잇는 게 우리 헌법 정신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마지막 내각에는 김구의 한국독립당만 있었던 게 아니다. 김원봉의 의열단을 이은 조선민족혁명당도 참여했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결합했다. 또한 사회주의를 내건 조선민족해방동맹도 있었다.


‘아리랑’ 김산과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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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김성숙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민주적 의사표시가 억압당하는 곳에서는 지도력의 문제가 위험하고도 어려운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조선민족해방동맹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김산이 미국 작가 님 웨일스와 함께 쓴 항일운동 회고록 <아리랑>(송영인 옮김, 동녘 펴냄, 1992)을 아는 이는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바로 김산이 속한 단체였다. 본명이 장지락인 김산이 <아리랑>에서 언급한 절친한 동지 운암 김성숙과 함께 1936년에 결성한 정치조직이 조선민족해방동맹이다.

<아리랑>에서 김성숙(1898~1969)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 김충창”으로 소개된다. 실은 성숙도, 충창도 본명은 아니다. 본명은 김규광. 그는 평안북도 철산군의 가난한 농민 집안 출신이었다. 비록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대한제국 군인이다가 의병에 참여한 삼촌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은 뚜렷했다. 18살이 되자 간도에 있다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러다 발길이 머문 곳이 금강산 유점사였다. 그곳에서 출가한 뒤 받은 법명이 ‘성숙’이다.

승려 성숙은 경기도 봉선사 월초 스님 문하에 있었는데, 월초는 예사로운 승려가 아니었다. 손병희, 한용운과 막역한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김성숙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을 낭독한 탑골공원 현장에 있었다. 촛불시위의 선조 격인 독립만세운동에서 김성숙은 한 명의 촛불시민이었던 것이다. 한 달쯤 뒤 김성숙을 비롯한 월초의 제자들은 봉선사가 자리한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김성숙은 또 다른 운명의 인물과 만났다. 3·1운동 중 한성임시정부 선포에 함께하다 잡혀온 김사국이었다. 한때 불자였던 김사국은 젊은 승려 성숙과 죽이 잘 맞았다. 김사국은 이때 이미 막연하게나마 사회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다. 출감 뒤 그는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핵심 조직 가운데 하나인 서울청년회를 이끌게 된다. 김사국을 통해 김성숙의 항일의식에는 사회혁명의 꿈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김성숙은 3·1운동의 여진을 노동운동, 농민운동으로 이어가려는 노력에 결합했다. 민주노총의 먼 뿌리인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발전하는 조선노동공제회가 그런 조직이었다. 한데 김성숙은 실천의 의지뿐만 아니라 배움의 의지 또한 컸다. 1923년 그는 봉선사의 몇몇 젊은 승려들과 함께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다들 유학이라고 하면 일본을 떠올리던 시절에 이들은 중국을 택했다. 학문 정진과 항일운동을 하나로 결합하려는 선택이었을까. 아무튼 김성숙은 베이징대학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김성숙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선배 혁명가 장건상과 협력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베이징 지부 격인 창일당을 결성했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했다. 이때쯤 김성숙은 확신에 찬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7살 연하의 장지락을 만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르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미 이 시기부터 김성숙이 민족혁명을 위해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의 광범한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혁명 위해 연합전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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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국무위원이던 김성숙은 해방 이후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초지일관 지켜오던 신념 탓에 고초도 겪었다. 1945년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한 김성숙(사진 속 노란색 원). 한겨레

민국대학에(베이징대학의 전신) 입학한 지 2년밖에 안 된 1925년부터 중국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남쪽 광둥에서 쑨원의 국민당이 신생 공산당과 손잡고 군벌을 타도하는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북방 군벌들도 저항세력 탄압에 나섰기 때문에 김성숙과 동지들은 더 이상 베이징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위기이자 기회였다. 광둥으로 피신한 김성숙은 이곳에서 민족혁명의 다시없는 기회를 보았다. 국민당-공산당이 북벌에 성공해 중국 전체를 통일하면 만주로 진출하려는 일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재중 항일운동가들은 중국과 힘을 합쳐 독립전쟁을 치를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의열단의 김원봉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의열단을 공개 정치조직으로 전환하고 단원들을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시켰다. 조선 혁명가들을 북벌군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여시키려는 포석이었다. 광둥에 도착하자마자 의열단에 가입해 정책과 선전을 책임지게 된 김성숙도 이런 조·중 연합 작전의 일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조선 혁명가들의 원대한 꿈은 무참히 배반당했다. 1927년 북벌에 나선 국민당군 장제스 사령관이 상하이에 진출한 외세와 손잡고 어제의 동지 공산당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제1차 국공합작의 결렬이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에만 타격이 아니었다. 국민당이 제국주의와 타협했다는 것은 중국혁명이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확산되길 바란 조선 혁명가들에게도 비보였다.

김성숙은 공산당 편에 서서 국민당의 배신을 규탄했다. 광저우에서 공산당이 일으킨 봉기에 참여했다가 중국인 아내 두쥔후이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김성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뒤에는 루쉰이 이끌던 중국좌익작가연맹에서 항일 선전을 펼쳤다.

그러나 김성숙은 1935년 중국공산당을 탈당했다. 김성숙과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장지락은 <아리랑>에서 이 무렵의 심경 변화를 상세히 토로했다. 그는 당 지도자들이 일선 당원이나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실패가 빤한 봉기를 고집하는 모습에 절망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민주적 의사표시가 억압당하는 곳에서는 지도력의 문제가 위험하고도 어려운 것이다. 진정한 민주적 대중투표를 하면 잘못된 결정이 내려질 수가 없다.” 이 입장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코민테른식 전위정당 신화는 무너지고 만다.


‘중국혁명 의존은 한계’ 절감

당내 민주주의만 쟁점은 아니었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중국혁명에만 민족혁명의 기대를 걸 수 없음을 절감했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이라는 당면 과제에 집중하는 독자 조직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마침 일본 침략에 맞서 제2차 국공합작이 급물살을 타던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다.

중일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조선 혁명가들 중 상당수는 홍군 근거지인 연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민족해방동맹은 연안이 아니라 충칭으로 눈을 돌렸다. 임시정부에 참여해서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다. 실천가인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김구와의 경쟁의식 때문에 임시정부 참여를 망설였지만, 오히려 이론가인 김성숙이 나서서 김원봉을 설득했다. 김성숙은 1941년부터 임시정부에서 활동해 3년 뒤 국무위원(각료)으로 선출됐다.

1945년 드디어 해방을 맞아 환국을 준비하면서 김성숙은 ‘약법 3장’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이랬다. “첫째, 국내에서 극좌와 극우가 항쟁하는 경우에 임정은 어느 파에도 편향함 없이 다 같이 포섭하도록 노력한다. 둘째, 임정의 헌법과 국호, 연호를 채택한다는 조건 아래 각 정당을 포괄해 임시의정원을 확대하고 민주정부를 조직한다. 셋째, 미국과 소련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아래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국내에 돌아오기 전부터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방침을 명확히 한 것이다.

김성숙은 귀국해서도 초지일관했다. 김구 세력이 반탁운동으로 우파만의 집권을 시도하자 임시정부에서 탈퇴해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동참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뒤에는 오랜 동지 장건상(제2대 국회의원)과 함께 남한에서 진보정당의 험난한 길을 이어갔다. 이승만 아래서도, 박정희 아래서도 거듭 투옥의 고초를 겪었다. 1969년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옛 동지들이 마련해준 10평짜리 오두막뿐이었다.


해방 뒤 진보정당 가시밭길

아니, 오두막만이 아니었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면서 장지락과 함께 나눈 고민 또한 남았다. 그들은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의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이 대국과 같거나 하나일 수 없음을 꿰뚫어봤다. 이런 나라는 강대국들과의 치열한 협상을 통해 자율성 공간을 스스로 확보해야만 민주주의도 사회변혁도 가능하다.

지금 기성 제국 미국과 신흥 강국 중국 사이의 긴장이 예사롭지 않다. 누구는 이를 대반전이라 반기고, 누구는 익숙한 상전의 옷자락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김성숙의 고뇌와 결단이다. 21세기에 민족해방(NL)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것은 1980년대의 잘못된 출발이 아니라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그것이어야만 한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