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2회 현충일을 맞은 6월 6일, 대전현충원에서 11개 팀 18명의 대학생들이 출전한 가운데 제1회 적폐청산리그가 진행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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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를 찾아내는 ‘제1회 대전 현충원 적폐청산 리그’가 현충일 당일 오후 대전현충원에서 개최됐다.
대회를 주최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는 “현충원은 민족의 정기와 애국의 넋이 자리 잡은 신성한 곳”이라며, “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왜곡되고 뒤틀린 역사로 인해 독립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넋을 어지럽히는 인물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대전현충원을 통해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 역사의 왜곡이 어떻게 심각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역사를 바로 세워가는 과정을 대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대회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대회가 시작된 곳은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지사가 묻혀 있는 애국지사 제2묘역 771호 앞 이었다. 대회는 주어진 시간인 90분 안에 친일파, 민간인 학살, 5.16쿠데타,12.12쿠데타 등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를 찾아 묘소 혹은 묘비 사진을 찍어 SNS에 인증을 많이 하는 팀이 우승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 대회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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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에 앞서 인사말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은 “이번 대회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대전현충원에 있는 적폐청산을 위한 일”이라며, “이러한 대회는 처음이니 긍지를 갖고 대회에 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적폐세력들, 대부분 장군묘역에 안정되어 있어..
‘반민족 반민주 행위’ 이후에도 승승장구
오후 3시 10분 대회가 시작되자, 참가팀들은 장군묘역과 애국지사묘역 등 100만평의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적폐세력들을 찾아내기 위한 질주를 시작했다.
이들이 찾아낸 대표적인 친일파로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석범(해병대 중장), 신현준(해병대 중장), 송석하(육군 소장)을 비롯해 김일환(육군 중장), 석주암(육군 소장), 윤수현(육군 준장), 이형근(육군 대장) 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신상철(공군 소장), 박승훈(육군 소장), 백홍석(육군 준장) 등이 있다.
이들 모두는 장군1묘역과 장군2묘역 등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대전현충원 공훈록에 만주군관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경력에 올리고 있는 이들이 있어 더 큰 분노를 자아냈다.
신현준은 ‘1937년 만주 봉천 군관학교 졸업’과 ‘1944년 만주군 제8단 제6연대장’을 공훈록에 기록해 놨고, 송석하는 ‘1937년 만주국 군관 양성기관 봉천군관학교 졸업(제5기)’, 석주암은 ‘1936년 만주간도사관학교 졸업’, ‘1939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을 공훈록에 남겼다. 김일환과 김석범, 김동하도 마찬가지로 공훈록에 자신의 친일행적을 남겼다.
▲ 적폐청산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적힌 인증표식과 함께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의 묘비를 찍어 SNS에 인증했다. 해병대를 나왔다고 밝힌 채재현 학생이 해병대 초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중장의 묘를 찾아 인증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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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를 나왔다고 밝힌 채재현 학생은 해병대 초대 사령관을 신현준 중장의 묘를 찾아 인증을 한 후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대해 설마설마했다”며, “막상 그의 행적을 알고 나니 해병대 출신으로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해병대 초대사령관이) 독립운동가였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자부심이 있었을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테러를 일삼았던 서북청년단의 선우기성과 문봉제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었다.
서북청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했던 선우기성은 1930년 1월 18일 오산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주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서북청년회 중앙본부 단장을 지낸 문봉제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하여 경찰관묘역에 안장되었다.
대전현충원에는 백범을 죽인 자와 백범을 낳고 기른 이가 동시에 묻혀 있어..
가장 악명 높은 이로는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강점기 관동군 헌병대 정보원으로 일했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 탐지했고, 1943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왕근례를 체포하고, 비밀 조직을 일망타진시키는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국군의 하사)으로 진급했다.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했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 두 차례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탈출해 월남했다. 1946년 서울에 도착한 김창룡은 우연히 만난 관동군 시절 만주군 장교였던 박기병(국방경비대 사령과 부관) 소위의 도움으로 부산의 제5연대(연대장 백선엽)에 입대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친일반미파에서 투철한 반공친미파로 옷을 갈아입고 변신한 것이다.
이후 김창룡은 숙군작업, 고문, 용공조작 등을 하며 육군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김창룡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원,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육군특무부대장 등을 지내며 민간인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김종필(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 근무)은 2000년 1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시킨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당시 육본본부 정보국 4과장)이 한 것이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창룡은 지난 1992년에 안두희에 의해 김구 선생 암살 당시 ‘실질적 지령’을 내린 인물로 지목됐었다.
김창룡의 묘지는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김구의 맏아들 김인의 묘지(애국지사 771호와 772호)와 낮은 야산을 사이에 두고 있어 참배객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등 대전지역 시민사회에서는 김창룡의 묘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 1998년 이후 지속적으로 김창룡 묘 이장을 촉구해 왔다.
▲ 적폐창산대회에 앞서 오전에 진행된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 후에는 평화재향군인회를 주축으로 김창룡 묘 이장을 요구하며 김창룡 묘(장군 1묘역 69호)앞에서 파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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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4.3사건 진압 책임자 중 한사람인 함병선, 사상검사로 악명을 떨치며 보도연맹 결성 및 관리를 주도했던 오제도,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이형근(당시 제2사단장 겸 충청지구 위수사령관)과 대전형무소 재소자학살사건 핵심가해자였던 김득모(당시 제2사단장 헌병대장)도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었다.
또한 ‘5.16쿠데타’와 ‘12.12쿠데타’의 주역들도 다수 안장되어 있었다. 5.16쿠데타 관련자로는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 김진위, 정명환, 김인화,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 등이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었고, 12.12쿠데타 관련자들로는 유학성, 진종채, 소준열, 이차군, 정동호, 우국일, 김택수, 김기택, 정도영, 안현태, 송응섭, 김윤호 등도 마찬가지로 모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었다. 이중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은 친일경력도 갖고 있었다.
국립묘지법 개정하여 현충원에서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를 이장시켜야..
안장 자격 없는 이들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국립묘지법)’의 빈틈을 노려 안장시킨 경우도 있었다. 유학성(육군 대장)은 12.12쿠데타의 핵심인물로 지목돼 군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복역하던 중 병세가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돼 있던 상태에서 숨졌다.
현행 국립묘지령 제3조는 전역 및 퇴역한 예비역 대상자 중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집행유예 중에 있는 자"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하고 있으나 당시 국방부는 "형 확정 전 무죄추정"과 "피고인 사망 시 공소기각"이라는 법리를 내세워 유 전 의원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안현태는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 등) 위반으로 1997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복역 중 사면됐고 잔형 집행을 면제 받았고, 곧이어 복권도 이뤄졌다. 징역형을 선고받자마자 사면과 복권까지 이루어졌으니 법이 '있으나 마나'가 돼 버렸다. 국립묘지령에는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된 사람’은 안장을 배제하고 있지만 안씨의 경우 '사면 복권'을 내세워 불허조항을 거뜬히 통과했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안장대상심의위원회 일부 심의위원들이 안씨의 서면심의에 반발하며 위원직 사퇴의 뜻을 밝혔는데도 표결 처리를 강행하기도 했다.
▲ 유학성의 묘(장군 제1묘역 2) 앞에는 여전히 국군기무사령관 등이 보내온 여러 화환이 자리하고 있고, 아직도 청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유학성의 묘를 찾아내 SNS인증을 하고 있는 참가팀.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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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국립묘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날 대회를 진행한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홍경표 사무국장은 “내란·외환죄 외에 친일반민족 행위, 헌법유린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서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반민족행위와 헌법유린 행위가 뒤늦게라도 확인되면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해야”하고, “이미 안장된 경우라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홍경표 사무국장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찾아낸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들은 50여명에 달한다”며, “이들 대부분이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어 우리 사회가 반민족 반민주 행위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일본군 또는 만주군 장교 출신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친일청산이 여전히 유효한 과제다”고 덧붙였다.
대회 우승, 90분 동안 50명을 찾아 인증한 류체은, 남예림 학생팀
“대회를 통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 제1회 적폐청산리그에서 1위를 차지한 류체은(가운데), 남예림(오른쪽) 학생팀. 시상은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왼쪽)이 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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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결과 50명을 찾아낸 류체은(성결대 3), 남예림(한밭대 3) 학생팀이 960점을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3위 간에는 숨 막히는 순위경쟁이 펼쳐졌는데, 두 팀 모두 49명을 찾아내 940점을 얻었다. 하지만 대회규정에 따라 마지막 인증을 먼저 한 임현장(목원대 1) 학생이 2위를, 송인우(한남대 2), 채재현(우송대 2) 학생팀이 3위를 차지했다.
우승팀의 류체은 학생은 “역사공부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이런 대회를 통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고, 남예림 학생은 “그간 20번 이상 대전현충원에서 봉사활동을 해오면서도 이 사실을 몰랐다”며 “대회 취지가 너무 좋고,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2위를 차지한 임현장 학생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만 묻혀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던 현충원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어서 충격이었다”며, “SNS에 올리면서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렸고, 현충원에 묻혀 있는 진정한 애국지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3위 팀의 송인우 학생은 “(대전현충원에 적폐세력들이)이렇게 많이 묻혀 있는 줄 몰랐다”며, “이들은 없어져야 할 잔재이고, 대회 참여를 통해 역사를 다시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는 이날 오전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를 대전현충원 입구 현충교에서 진행했다. 촉구대회 후에는 김창룡 묘(장군 1묘역 69호)로 이동하여 파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또한 이들은 김구 선생 모친 곽락원 지사(애국지사묘역 771호)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을 지냈던 부민관 의거의 조문기 지사(애국지사묘역 3-705)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와 헌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충남지부,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평화재향군인회, 대전충청5.1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현충일 오전 대전현충원 앞 현충교에서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를 진행했다. 이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 같은 대회를 지속해 왔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