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최동준 인턴기자 = 서울 우이동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
보훈처, 19일 몽양 여운형 서거 70주기 추모식 개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0주기 추모식이 19일 오후 2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다.
18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모식은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기념사업회원 및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여운형 선생은 1885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해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읽히고 1908년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8년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우리들 소식'을 발행했으며 8월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해 2· 8독립선언을 촉발케 하였다.
3· 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11월에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했고,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서울=뉴시스】정윤아 기자 = yoona@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