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은 정부의 형태보다는 운동단체의 육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의 행보는 광폭이었다.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일본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해 세계의 이목을 모았으며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고, 중국에서는 쑨원(孫文), 장제스(將介石)와 교분을 쌓는 등 가히 종횡무진이었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와 공산당 또한 독립과 좌우 통합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던 차 1929년 몽양은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가출옥한 그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지하활동에 주력했다. 그 세월 동안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냈다. 한편, 일본의 패망을 감지한 1944년에는 은밀하게 조선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해 해방 후의 건국을 준비했다.
1945년 8월 15일 몽양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조직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야심을 가진 정치세력들에게도 그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의 극한 분열과 대립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중도좌파를 대표해 중도우파의 대표인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해 나라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몽양의 꿈은 끝내 현실로부터 외면당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청년 한지근이 권총으로 몽양을 암살했으니, 그것은 해방된 후 그에게 저질러진 12번째 테러였다. 1945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 갈 양심적 지도자’ 항목에서 33%를 얻어 이승만과 김구를 압도하며 1위에 올랐던 거목은 그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그의 장례에는 구름 인파가 몰려 애도했다.
그 후로 남은 그의 집안사람들은 고초를 겪으며 힘들게 살아야 했다. 그나마 그에 대한 평가가 늦게라도 이뤄진 일은 다행이다. 2005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2008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각각 추서됐다. 2011년에는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소앙 조용은(素昻 趙鏞殷 1887∼1958)=소앙 또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에 속한다. 그의 집안은 이 나라 독립운동의 최고 명문가다. 형제와 가족들 가운데 14명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공로로 독립유공자 수훈을 받은 사실은 이를 충분히 입증하고 남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그리 높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소앙은 1887년 4월 8일 경기 교하군(지금의 파주) 월롱면에서 7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성균관 학생 시절에 일본에 유학했다. 1912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근대 사상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됐다. 유학을 마치고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문’은 고종 황제로부터 나라를 양도받았다는 논리를 통해 국민주권을 강조하고 민주공화국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19년 2월 작성해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문에 큰 영향을 준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평가받는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을 제정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만들고 문안을 작성하는 등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다. 외무총장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소앙은 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의 ‘삼균주의’ 제창자로 유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건립할 대한민국의 기본계획과 방향을 설정했으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사실상 그의 기획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는다.
1945년 12월 귀국한 소앙은 남북의 분단을 막고 좌우를 통합하는 데 노력했지만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1950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됐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납북의 운명을 맞이하고 만다. 북한에 억류된 상황에서도 한반도의 중립화와 평화통일운동을 벌이던 소앙은 1958년 9월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2016년에는 양주시 황방마을에 조소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해공은 1894년 7월 11일 광주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1년 일본으로 유학해 1915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해 교편을 잡는 한편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했다.
1919년 3·1운동 참여 후 중국으로 떠나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곧이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했다. 해공은 이시영·조소앙과 함께 헌법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제1조로 표기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명문화한 헌법이자 대한민국 헌정사의 첫걸음이 됐으니 매우 중요한 역사의 장면이다. 또한 같은 해 9월 제정·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앞에 소개한 소앙과는 각별한 사이여서 ‘내외지간’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44년 임시정부가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했을 때도 해공이 내무부장을 맡고 소앙이 외무부장을 맡았으니 그럴싸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해방 이후 귀국한 해공은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하는 한편 활발하고 굵직한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1956년에는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호남지방 유세를 위해 이동하던 기차 안에서 뇌일혈로 인해 세상을 떠났으니 5월 5일 새벽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가 대유행하게 됐다고 한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운암 김성숙(雲巖 金星淑, 1898∼1969)=운암은 1898년 4월 29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태어났다. 이를 두고 경기 출신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은 곤란하다. 앞에서 살핀 인물들만 하더라도 삶이 한 곳에만 머무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글로벌한 행적들이 두드러진다. 그러니 수용기의 폭을 넉넉하게 잡아주는 것이 좋겠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집안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이사했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6년 용문사에서 출가하고 남양주의 봉선사에서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아 승려가 됐다. 이 시절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했다. 승려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더욱 강력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했으며 1923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도 다양한 항일운동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의 스승 ‘붉은 중’이 바로 운암이다. 조선의열단과 재중국조선청년동맹 등은 대표적인 그의 활동 영역이었다.
각 조직들 간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하면서 통합에 힘쓰던 운암은 1942년부터 임시정부에 본격 참여해 국무위원과 내무차장, 외교연구위원 등을 맡았다. 그런 과정에서 1945년 5월 이승만의 탄핵과 해임을 주장한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45년 12월 3일 임정요인 환국 제2진으로 귀국했다. 해방 이후에도 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미군정에 반대해 옥고를 치러야 했고, 1958년엔 이승만정부가 조작한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심지어 1961년에는 군사정변의 장본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투옥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말년은 더욱 궁핍했다. 결국 1969년 4월 12일 주변의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고 마련해 준 피우정(避雨亭, 성동구 구의리, 지금의 광진구 구의동 소재)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82년 운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는 도덕의 판례집=일제강점기 시절 안온하고 유복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대체로 ‘친일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사실 친일파라는 이름마저도 너무나 순화된 표현이다. 그들의 행적은 분명히 반민족행위에 속한다. 잘 봐줘도 기회주의의 행태일 따름이다. 시대가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하며 오히려 자신들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발전했노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적반하장에 마냥 놀아나서는 곤란하다. 보수가 존중받는 이유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민족행위가 본질인 친일파의 줄기와 가지들이 보수를 참칭해 나서는 일이 빈번하니 우려할 만한 풍경이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적 토대가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경계와 각성이 절실한 시절이다.
글·사진=강정훈(철학박사,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