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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News] [인터뷰] 최성주 "부산 땅 6배 소유한 최운산 장군, 봉오동 전투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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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16회 작성일 19-09-0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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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cpbc TV 가톨릭뉴스 
○ 진행 : 맹현균 앵커 
○ 출연 : 최성주 임마쿨라타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 


최근 영화 「봉오동 전투」의 흥행으로 독립군의 활동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라고 하면, 홍범도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을 떠올리는 분들 많으실 텐데요. 

그런데 독립군의 훈련과 무장을 도운 숨은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입니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이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인 최성주 임마쿨라타 님 나오셨습니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하면서 우리 독립군의 활동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어요. 영화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 봉오동 전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 그런 고마운 측면은 있는데요. 봉오동 전투 자체는 굉장히 축소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봉오동 전투에 대한 왜곡을 확산시키는 역할도 하겠구나. 되게 아쉽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봉오동에는 굉장히 큰 독립군 기지가 있었고, 일제 문서에서 보면 장원이라고도 표현하고 성채라고도 표현하는 그런 큰 성 안에 둘러싸여 있는 굉장한 기지였거든요. 몇 천 명의 독립군이 거기 같이 머물렀고 그런 부분들이 별로 드러나지 않고 축소된 아주 작은 지역으로 보여줘서 아쉬웠습니다. 



▷ 그런 부분의 설명을 지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최운산 장군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어떤 분이셨나요? 

▶ 봉오동을 독립군 기지로 개발하고 관철했던 분이죠. 1912년부터 봉오동을 사병 부대를 양성하셔서 무장군인들을 거기서 훈련 양성을 했다 그럴까요. 하다가 1915년부터는 봉오동에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짓고 독립군들과 함께 거기를 대규모 기지로 건설하셨어요. 그러다가 1919년에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대한민국의 첫 군대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군무도독부를 본인의 사병 부대를 자연스럽게 전환시키셨던 그런 분이셨어요. 그래서 일제 문서에도 ‘대한군무도독부는 670명이었다’ 이런 기록이 있거든요. 



▷ 그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한 거잖아요. 

▶ 그 부대가 중심이 돼서 1920년에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들이 통합을 해요. 통합해서 이뤄낸 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라고 하는 대규모 통합부대가 있는데 그 군대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죠. 



▷ 그런 군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군자금도 필요했을 거고, 여러 가지 준비사항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 것은 어떻게 마련됐나요? 

▶ 최운산 장군이 간도 제일의 거부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굉장히 넓은 토지, 부산의 6배 정도 되는 토지라고 전해들었는데요. 토지와 콩기름공장, 국수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뭐 이런 생필품 공장들을 많이 운영하셔서 계속 돈을 벌면서 무기를 사고 하는 그런 군자금을 유지하셨다고 할까요. 보충할 수 있었고, 러시아에 소를 납품하는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셨는데 한번에 소를 팔러갈 때 수출할 때 3~400마리씩 몰고 가서 넘기셨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렇게 러시아와 그런 연계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지속적으로 러시아에서 구입해올 수 있었고 나중에 체코군한테서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그래서 봉오동 전투 당시에 우리 군대는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죠, 전체가 다. 



▷ 거의 그 부대의 초석을 다진 분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겠군요. 당시 독립군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군을 이겼습니다. 그 비결은 뭐라고 보세요? 

▶ 많은 분들이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쏴서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그런 측면도 있었겠죠. 그치만 총 한 방으로는 한 명의 군인 밖에 손을 못 보기 때문에 우리 군대가 일본군을 이길 만큼의 필적할 만큼의 인력과 무기와 작전과 이런 것이 준비돼 있었다는 거죠.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유인전술도 썼었고, 일본군이 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봉오동에 있는 주민들을 완전히 비워서 마을을 텅 비게 했던. 그런 준비들이 이미 한 보름 전에 다 완전히 끝났고 봉오동 산에는 참호를 팠어요. 매복전을 하기 위해서. 제가 그 참호에도 가봤는데, 그런 준비가 다 이미 보름 전에 끝나 있었던. 또 봉오동 산 위에 각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을 하고 독립군들이 일본군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준비된 작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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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의 일본군을 이기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가 미리 돼있었다는 말씀이시죠. 주제를 바꿔서 최운산 장군은 서훈이 1977년에 됐다고 들었습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요.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있던데...

▶ 1960년에 서훈 작업이 처음 진행될 때 서훈 신청을 하셨어요. 그때는 원호처도 없었고 총무처에서 그 일을 할 땐데, 1961년에 서훈 심사를 통과했다고 총무처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나가셨을 때 총무처 담당자가 뒷돈을 요구한 거에요. 서훈을 조건으로. 그래서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못 참으신 거죠. 모욕감에 그 분한테 주먹을 휘둘렀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 분이 쓰러지고 그랬다는데, 그러고 나서 취소가 된 거에요. 통과가 됐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 이후로도 계속 신청해도 안 되고 60년대에는 안 되고, 77년에야 서훈이 되셨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아버지가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죠. 



▷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네요. 그리고 이 분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최운산 장군의 아내이자 이사님의 할머니이시죠. 김성녀 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도 지금 추진하고 계시죠? 

▶ 제가 할아버지 역사를 돌아보면서 제일 크게 깨달은 게 할머니의 역할이에요. 지금 우리는 아내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대충 다 이해를 하잖아요. 재산 분할도 요구할 만큼 여성들의 역할이 이제 인정받는데, 저도 어릴 땐 할머니의 역할에 대해서 별로 주목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훌륭한 남편을 당연히 도와야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돌아보면 할머니가 그 나머지를 다 채워주지 않았으면 독립군을 먹이고 군복을 지어 입히고 그런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지 않았으면 할아버지의 과업이라고 할까요, 그것이 완성 될 수 있었을까. 할머니야말로 제일 중요한 분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분을 여성 독립군으로 서훈을 받게 하는 게 응당한 일이다. 그래서 서훈 신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 잘 준비는 되고 계신 건가요? 

▶ 많은 분들이 같이 공감해주시는데, 아직 서훈 심사에서는 누락이 되고 있어요. 



▷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주체적인 활동을 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 병참 책임자였죠. 



▷ 마지막으로 최운산 장군의 활약이 알려지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게 있으시면 설명해주시죠. 

▶ 내년이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거든요. 1920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북간도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저희가 많이 몰라요. 제가 봉오동이라고 하면 봉천동 옆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봉오동이라는 북간도의 독립군 기지에 대한 재조명. 최운산 장군 개인이 아니고 북간도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그런 의지와 역사에 대해서 새롭게 알리는 작업 그런 걸 좀 더 꾸준히 하고 싶습니다. 



▷ 지금까지 봉오동 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 장군의 손녀이신 최성주 임마쿨라타 님 만나봤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cpbc 유은재 기자(you@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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