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1년~1945년, 독립운동가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에 가입, 안창호 등과 평안도에서 대성학교를 경영하며 인재 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사의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었으며, 1930년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의 독립지사들을 한데 묶기 위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그 주요 실무 간부로 활동하였다. 홍보선전책자로 「한보」·「한성」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 의욕을 드높이는 데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의한 5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 통합을 통해 조선민족혁명당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했던 김원봉·김두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폐쇄를 강력히 주장,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김규식·조소앙·최동오·양기탁·유동열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 때 송병조와 함께 김구·이시영·조완구·김붕준·양묵·이동녕·안공근·엄항섭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어 주석에 이동녕이 선출되었을 때 비서장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그 직책을 고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충칭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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