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
1919년 2월 초 독립선언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를 만나 상의한 데 이어,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이 독립선언 진행방법 등을 검토, 천도교·기독교·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서명할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송진우·최남선은 구한말의 대신들을 만나 상의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해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키로 했다.
한편 기독교 측은 이승훈, 천도교 측은 최린이 각각 교섭에 나서 많은 동지를 얻었으며, 이를 안 불교 측에서도 한용운·백용성 등이 가담, 결국 기독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으로 모두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키로 하고 총대표에 손병희를 추대함으로써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손병희(孫秉熙)·길선주(吉善宙)·이필주(李弼柱)·백용성(白龍城)·김완규(金完圭)·김병조(金秉祚)·김창준(金昌俊)·권동진(權東鎭)·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나인협(羅仁協)·양전백(梁甸白)·양한묵(梁漢默)·유여대(劉如大)·이갑성(李甲成)·이명룡(李明龍)·이승훈(李昇薰)·이종훈(李鍾勳)·이종일(李鍾一)·임예환(林禮煥)·박준승(朴準承)·박희도(朴熙道)·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신석구(申錫九)·오세창(吳世昌)·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최성모(崔聖模)·최린(崔麟)·한용운(韓龍雲)·홍병기(洪秉箕)·홍기조(洪基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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