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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최운산 장군 순국 76주기, 5일 오후2시 현충원에서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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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7-06 14:57 조회20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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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원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의 실질적 주역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의 76주기 추모식이 7월 5일 오후2시 현충원에서 열린다. 

최운산장군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한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숨은 영웅으로 독립전쟁의 제1의 회전으로 불렸던 봉오동전투의 대승에 힘입어 우리 민족은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 수 있었다.

최운산장군은 1919년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하고 1920년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다. 통합독립군 <대한북로독군부>의 편제는 의무부대, 보급부대를 따로 편성할 만큼 대규모였으며, 대포, 기관총, 장총, 수류탄, 권총 등 일본군에 필적할 우수한 무기를 소유하였다.

1912년 봉오동에 창설한 사병부대를 모체로 하여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와 십리평를 주둔지로 내어주고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 창설을 주도한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의 동생으로 당시 간도 제일의 거부였으며 3천 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식량과 군복, 무기 공급 등 초기의 군자금 일체를 자비로 감당하였다. 1924년~1926년 3년간 감옥생활을 한 것을 비롯, 일생동안 모두 여섯 차례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1939년, 10개월간 투옥 당한 최운산장군은 해방을 한 달 앞 둔 1945년 8월15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했던 간도 거부 최운산의 꿈

기미독립선언 이후 간도로 넘어오는 애국청년들이 급격하게 늘어나 이들을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하기 위해 십리평에 단기 사관학교 설립한다. 

통합부대의 독립군 수천 명을 정예 독립군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석현의 토지를 5만원에 팔아 러시아에 가서 무기를 구입하고 온성군 풍리동, 풍교동, 남양동을 비롯한 수십 군 데 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해 뛰어난 사격술로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때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창설하며 <대한군무도독부>, <국민회군>, <북로군정서>, <신민단>, <광복단>, <의군부>를 비롯한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 부대들이 개별 부대명을 버리고 대한민국의 통합독립군단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난 배경에는 무기, 식량 군복 등 모든 군자금을 최운산이 책임진다는 약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간도의 독립운동, 우리는 너무 몰랐다
  
흔히 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이미지는 무기와, 식량, 군복도 없이 헐벗고 굶주리는 만주 독립군을 떠올린다. 이들은 애국심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했을까? 봉오동전투는 무기도 없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기적이었을까?

봉오동전투는 소규모 게릴라전이 아니라 일본군과 독립군이 격돌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은 아늑하고 넓은 대형 분지 형태의 여러 대형 연병장을 가진 대규모 군사기지였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산간,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 지(之)자형으로 장장 2십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있어서 며칠 만에 한번씩 중국 관헌이 순라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 " -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중에서  


서간도와 북간도를 구별해야

압록강 건너 서간도, 두만강 건너 북간도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서간도에서 신흥강습소를 시작할 때 북간도에는 이미 완전무장한 군대가 존재했다. 만주독립군은 모두 신흥무관학교에서 양성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봉오동·청산리·대전자령전투 등 주요 전투는 모두 북간도에서 일어났으며 봉오동전투는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의 존재를 파악한 일본의 토벌작전이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 세력은 대부분 북간도 봉오동에서 자체 양성된 독립군이었으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에는 연해주 독립군이 대규모로 합류한다. 

만주 독립군은 어디서 무기를 구했을까?

1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봉오동 무장독립군의 관계를 알면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 비싼 무기를 어떻게 구했을까?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러시아로 들어왔던 체코군단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연해주와 가까운 봉오동에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은 체코군단의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인다.

돈이 있어도 무기를 살 곳이 없었으면, 반대로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으면 무기를 구할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톡에 주둔하고 있었고,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군의 운영을 책임졌던 최운산의 경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러시아군에 식량을 수출하던 무역업자 최운산의 경험과 외교력이 있었기에 대량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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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운산 장군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참모장을 맡아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을 비롯하여 안무, 박영,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한 수천 명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동부전선 나자구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독립군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휘하부대를 이끌고 피신한다. 이후에도 독립군기지 건설에 주력하여 다시 독립군을 모집하고 정세 분석과 일본군 동향 파악 등 비밀 첩보활동을 지속하며 새로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삼동지방 토지를 구입하였다. 1924년 일본경찰서 습격과 군자금을 모연한 불령선인으로 체포,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이름을 바꾸고 변장하며 무장투쟁을 이어 나간다.
 

일찍이 정착하여 생활기반을 굳혀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 전쟁의 장비며 군량 등을 보급하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과 최치흥 등 3형제의 업적은 봉오동전투 등을 비롯하여 당시(경신년)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다 . -이강훈,『무장독립운동사』중에서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한  최우삼 일가

최운산 장군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최운산 장군의 아버지 최우삼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연변 도태( 연변 지역 조선사람을 다스리던 관리) 최우삼은 청나라와 국경을 다투며 무력 충돌한 역사를 통해 투철한 민족의식을 품었던 인물이다. 최우삼 일가 4대(아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는 1909년 연길을 떠나 봉오동으로 이주, 신한촌 건설한다. 

북간도 독립군의 어머니 김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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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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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운산의 독립전쟁은 아내 김성녀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천 독립군의 식사 준비와 군복 제조 지휘한 병참 책임자이자 북간도 독립군의 어머니 김성녀 여사는 최운산의 동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공동의 집행자였다. 김성녀 여사는 해방 후 생존자와 학계의 왜곡에 맞서 봉오동 독립 전쟁의 역사를 전한 역사의 증언자이기도 했다. 최운산 장군을 비롯한 만주 무장독립투쟁의 역사를 살아온 모든 이름없는 독립군들, 이들이 살아낸 삶이 지닌 가치를 후손과 사회에 드러낸 가치의 전수자였다.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사록에 수록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반드시 사학가들에 의하여 사실이 입증되리라 보며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코자 합니다.”
- 김성녀의 진정서 중


76주기 추모식, 최운산 장군에게 바치는 노래

이번 추모식에는 최초로 최운산 장군을 추모하고 기리는 노래를 발표한다. 독립운동가의 노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모곡, 대구항쟁 추모곡 등 잊혀진 역사, 숨은 영웅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어온 가수 문진오는 최운산 장군의 삶과 봉오동 전투를 재조명하고자 박학봉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 '최운산 장군'을 만들어 이날 최초로 발표한다. 

한편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는 2016년 창립하여 해마다 북간도 독립전쟁에 대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추모식, 강연, 문화공연 등의 다양한 사업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살려내는 일을 하고 있다.

오는 7월 5일 최운산 장군 76주기 추모식을 개최하며 자신보다 민족을 위한 숭고한 삶을 택하고 실천한 최운산 장군의 삶을 기리고 전승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최운산 장군의 76주기 추모식이지만, 한 개인을 추모하는 시간이 아닌 오늘날 우리사회에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최운산 장군이 지녔던 공동체정신을 되살려 공존적 삶에 관심을 가지는 일에 앞장서며 우리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역사왜곡에 맞서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에도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봉오동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이름 없는 독립군들과 최운산 장군이 꿈꿨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승리를 향해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고 또 일어섰던 독립군들의 심정으로 추모식에 한송이 꽃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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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 출처 : 오마이뉴스 신채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