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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최운산 장군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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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6-30 11:42 조회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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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봉오동 전투의 영웅, 최운산 장군


우리는 통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사례로 미국과 유럽 사람들을 거론한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을 보인 인물을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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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 내로라하는 명문대가였던 우당 선생 일가는 나라가 망하자 집과 토지를

비롯해 전 재산을 급히 처분했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했을 때 2조 원대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재산이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갈 수 있는 재력가였다.

그 많은 재산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 달 만에 긴급히 처분하다 보니 600억 원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1910년 12월 그믐날 밤에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 집안의 60여 명은 차례차례

집단 망명을 감행했다.

전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남만주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1911)를 세웠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3500명에 이르는 항일독립군을 길러냈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그러나 이회영 형제들 가운데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이는 이시영 선생 혼자였다.


나머지 형제들은 중국 땅에서 병사하거나 굶어죽었다. 심지어 가족 전체가 집단

몰살당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이회영처럼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세계사적 전범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동만주 북간도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걸출한 역사적 인물이

존재했다.


아직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지만 앞으로 교과서에 기록될 것을 확신한다.


바로 최운산 장군이 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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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현 봉오동 일대와 십리평, 서대파 등 북간도 일대의 광활한 땅을 3일 밤낮으로

걸어도 모두 최운산 장군의 땅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했다.


실제로 최운산 장군은 여러 해에 걸쳐 곡물업과 축산업 등 러시아와 교역을 통해

북간도 제1의 거부가 되었다.


북간도 일대 비누공장, 콩기름공장, 국수공장, 주류공장, 성냥공장, 과자공장을

소유할 정도로 수많은 생필품 공장을 운영했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들인 소득을 전부 항일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요새에서 훈련시킨 독립군 병사들은 1920년 당시 670명에 달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산하 정식 군대인 '대한 군무도독부'에

편제되었다.


최운산 장군은 군무도독부 병사들에게 러시아 교관을 초빙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무기 또한 러시아 교역을 통해 체코 병단이 쓰던 신식무기를 대량 구매했다.


2019년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제4회 학술세미나에서 신효승은

논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 부대의 무기 도입'을 통해 봉오동

독립군 부대 무기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구입한 신식무기였다고 밝혔다.

2009년 연변에서 출간된 '중국 조선족혁명투쟁사'에서도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이동휘나 홍범도, 그리고 소비에트 기병대위 강필림(姜弼林)을

통해 무기 구입이 이뤄졌다고 서술돼 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직전 군무도독부는 안무의 국민회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통합군대인 '대한 북로독군부'를 5월 19일 출범시켰다.


바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 독립군 부대이다.

이들 '대한 북로독군부'가 소유한 무기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포 10여 문, 기관총 수십 정, 소총 1000여 정, 수류탄 수천 개, 실탄 수만 발에다

권총 수백 정으로 봉오동 독립군들은 중무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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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출신 독립운동가 김승학 선생이 1965년에 쓴 <한국독립사>와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1975년에 쓴 <무장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군무도독부 독립군 군복은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장군이 중국군에 복무한 경험을 살려 회색빛을 띤 중국군

복장이었다.

반면에 안무가 지휘한 국민회군은 일본군 복색과 비슷한 복장이었다.


일본군에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

부대들은 서로 상대방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교전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연출하기도

했다.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봉오동 독립군 부대 '도독부'를 임시정부 산하

정규군인 '군무도독부'로 편제해 정식 군대를 창설했다.


봉오동 전투(1920)의 주력부대인 '군무도독부'의 탄생에는 최운산 장군의 물질적

뒷받침이 결정적이었다.

670명이 묵을 수 있는 거대한 훈련장과 병영 막사 3개동이 존재했고 독립군들은

실전에 대비해 매일 군사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두만강 국경지대인 함경북도 종성군, 온성군 일대로 진입해 36차례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봉오동 전투 이전 시기인 1920년 3월~6월 사이에도 국내진공작전을 여러 차례 펼쳤는데

대부분 '군무도독부' 소속 항일독립군들이었다.


봉오동 군무도독부 독립군들이 머물던 공간은 거대한 군사요새로서 보안이 철저했다.


다가오는 항일독립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최진동 장군 - 최운산 장군 - 최치흥 장군

3형제의 숨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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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땅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독립군관을 양성하는

연성소를 세울 수 있게 토지를 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로 통합부대가 탄생된 1920년 당시,

하루 한 끼에 3000명분에 달하는 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봉오동 독립군의 군세는 막강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1975년 발간한 <독립운동사> 제6권 '독립군 전투사(하)'에도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일본군 19사단 안천 월경 추격대대와 병력과 군세 면에서

막상막하일 정도로 봉오동 독립군의 화력과 장비, 군 병력은 정규군과 맞먹었다.


이 모든 게 최운산 장군이 항일독립전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결과였다.

무술과 지혜를 겸비한 최운산 장군은 1912년에 창설한 '도독부'를 1919년 대한민국

정식 군대인 '군무도독부'로 개칭할 당시 참모장이었다.


자신의 친형인 최진동 장군을 사령관으로 추대했고 자신의 동생인 최치흥은 작전

참모를 맡았다.


최운산 장군 3형제의 군무도독부는 이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6개 부대를 통합해 1920년 5월 '대한북로독군부'를 출범시켰다.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바로 그 독립군 부대이다.


물론 군장비와 보급품 일체를 최운산 장군의 재산으로 모두 충당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은 최운산 장군의 친형인

최진동 장군이 맡았고 최운산 장군은 참모장을 맡았다.


김좌진 장군은 제1연대장, 홍범도 장군은 제2연대장으로, 그리고 오하묵 장군은

제3연대장을 맡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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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문제연구소 '국민회군 편찬위원회'에서 1974년 발간한 『抗日國民會軍』에는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가 정부에 제출한 「진정서」가 수록돼 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성녀 여사가 1969년 정부에 제출한 「진정서」와 증언에 따르면

당시 봉오동 군사기지에는 재봉틀 8대가 있었다.


봉오동 한인촌 마을 부녀자들은 독립군의 아내가 많았는데 이들이 독립군 군복도 짓고

세탁을 도맡아 했다.


봉오동 최운산 장군 자택은 독립군 본부로 사용하였는데 여기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한동안 머물곤 하였다.


군사회의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우마차에 군수품과 식량을 가득 실어 날랐는데

그 우마차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만큼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항일독립전쟁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1900년대와 1910년대 동북만주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안중근, 이준, 이상설,

김좌진을 비롯해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최운산 장군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거나

물질적 지원을 받았다.


김좌진의 신민부에 대한 재정적 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6. 6. 21. 하얼빈 일제 총영사(天羽英二)가 본국 외무대신(弊原喜重郞)에게 보낸

외교 발신 문건인『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3』중

「신민부 농업경영 및 군자금 모집 위해 鮮內地 침입 계획에 관한 건」에는

최운산 장군이 박찬익, 김좌진, 그리고 신민부 군사위원인 주백완과 함께 농업경영

자금과 군자금 모금에 대한 회의가 언급돼 있다.


최운산 장군은 1924년 9월 자신의 친형인 최진동 장군이 체포되기 전에 앞서 피검돼

감옥에 갇혔다. 3년 징역을 살고 나온 뒤에도 항일독립전쟁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최운산 장군은 생애 전 기간 모두 6차례 투옥되었고 석방될 땐 항상 수레에 실려

나온곤 했다.


문무를 겸비한 최운산 장군은 중국어엔 능통했지만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친형인

최진동 장군을 항상 앞세웠고 자신의 무공과 헌신을 드러내질 않았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의 승리 뒤엔 봉오동 전투를 직접 치러낸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 못지않게 최운산 장군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천 명에 이르는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을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키는 데

들였던 모든 비용을 최운산 장군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운산 장군은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그리고 시베리아

항일전쟁에도 참전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 민대표대회에도 여운형 선생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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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는 영화 『봉오동 전투』의 대사처럼 "조선의 마지막 전쟁"이

아니다. '대한북로독군부'에 합류한 안무의 국민회군 소속 당시 독립군들이 명명했듯이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었다.


따라서 그해 10월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치른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인 셈이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인 봉오동 전투는 1912년부터 봉오동 한인촌 기지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훈련시켜 온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오랜 기간 준비해온 항일

독립전쟁이었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5월 중순 이후에 합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지나치게

부각한 나머지 1920년 6월에 갑자기 승리한 전투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다.


오히려 자신의 전 재산을 항일독립전쟁에 바치고 목숨까지 바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오랜 시간 준비하고 일궈낸 빛나는 전승이었다.


영화 『봉오동 전투』 후반부에 나오는 홍범도(최민식 분) 장군의 카리스마만큼이나

오늘날까지 '봉오동 전투=홍범도 장군'으로 기억하게 해 온 것은 역사교육의 오류이자

분명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선생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봉오동 전투의 실체를 복원해 놓은 책이 최근 발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로서 가족들과 함께 스스로 국회도서관을 비롯해 흩어진 자료와

최진동 장군, 최운산 장군 친족의 증언을 채록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사와 가족사를

함께 복원한 것이다. 한국근대사, 바로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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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최성주 선생의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출간을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린다. 올해 2020년은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책 부제에도 밝혔듯이 「봉오동 독립전쟁 100주년, 숨겨진 어느 장군 이야기」에

우리 모두 귀 기울일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