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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남도일보]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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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10 14:20 조회7,0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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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3>일본군 전멸시킨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 위치한 봉오저수지
독립운동사상 일본군과 싸워 ‘첫 승리’


한민족의 자주독립 역량 입증한 ‘청산리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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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 위치한 봉오저수지 일대.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내년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기념비적 전투로 꼽히는 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이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처음으로 승리한 봉오동전투는 최근 류준열, 유해진 주연의 ‘영화 봉오동 전투’가 상영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으며 재조명 되고있다.

비록 군인은 아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 한자루로 일본 정규군을 상대했던 독립군. 자칭 자신들이 최고의 부대라고 여긴 콧대높은 일본군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긴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으며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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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저수지. 


봉오동 전투가 일본에 대한 첫 승리였다면, 청산리전투는 한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입증한 전투이다. 이를 계기로 민족의 항일 투지를 고무시켰으며 반일 무장 투쟁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는 당시 오로지 대한독립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 독립군의 희생정신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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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저수지를 들어갈 수 있는 길목.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 일본군에 첫 승리…봉오동전투가 벌어진 ‘봉오저수지’

중국 지린(吉林)성 왕칭(汪淸)현 봉오동에 위치한 봉오저수지 일대는 봉오동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아쉽게도 1970년대 댐이 만들어지면서 승리의 현장을 직접 느낄 순 없었다. 이날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어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저수지 일대의 땅을 밟아볼 순 없었지만 그날의 승리 함성은 자연을 타고 흐르는 바람 속에 귓가에 맴돌았다. 출입문 입구쪽에는 ‘봉오저수지’라고 쓰여있는데 과거와 달리 현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굳게 닫힌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곧게 뻗쳐진 길은 당시 독립군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봉오저수지로 가는 길목에는 당시의 승리를 기억하는 작은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1993년 6월 투먼시 정부가 세운 이 기념비에는 “일본 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줬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최진동이 이끈 연합독립군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자 200여 명을 만든 전과를 올렸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 4명, 부상 2명에 그치는 압도적 승리로 기념비적 전투로 꼽힌다.

당시 독립군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불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의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해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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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기념비.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 등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됐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을 준비한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켰다.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했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했을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여명을 사살했다. 다음날 새벽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 중대와 합세해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이날 아침 독립군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했다.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해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했다.

일본군의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은 협공을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는 등 큰 성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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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 한민족의 자주독립 역량 입증한…청산리 대첩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는 청산리가 있다. 주위가 산으로 첩첩 둘러쌓여 있다하여 청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독립군이 청산리를 결전지로 정한 것은 이처럼 산을 이용할 수 있는 전술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청산리에는 2001년에 세워진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문에는 “청산리 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연변 지역 각 민족 인민이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위업을 천추 만대에 전한다”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김좌진·홍범도·최진동 등이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해 한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입증해 보인 대첩으로 평가된다.

그해 청산리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이다.

청산리 전투기념비에는 ‘해 내외를 진감한 청산리 항일 대첩은 항일 투쟁 사상 천고에 빛날 력사적 전역이어늘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 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 련합 부대는 화룡시 2-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의 대폭적 지원하에 협동 작적으로 백운평 와록구 어랑촌 874고지, 고동하반 전투 등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 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 지역 반일 무장 투재 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독립운동을 추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청산리 대첩은 일군 무적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 내지 전국 가 민족 인민의 항일 투지를 지대히 고무하고 일본 국군주의의 위풍을 추풍락엽처럼 쓸어 버렸거늘, 그 실패를 달가와 않은 일본 침략군은 연변 지역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선후로 2천600여명을 참살한 보복의 경신년 대학살을 감해하였은 즉 그 죄 하늘에 그 참상에 치가 떨리는도다. 청산리 대첩 80주년에 즈음하여 연변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현들의 충혼을 기리고 그 위업 천추만대에 전하노라. 경신년 대참안 중 조난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흘려 분전하신 항일 영령들이여, 영생불멸하라!’라고 쓰여져 있다.

역사적 승리가 벌어진 봉오저수지를 뒤로한 채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독립군을 양성한 마을로 향해 당시의 흔적을 찾아 취재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