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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라이프매거진] 운암 김성숙선생의 나라 희생, 중국 친손자 두닝우가 기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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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14 11:32 조회5,7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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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 1964.2.13 - 

김성숙의 일기 중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1898-1969)

 

김성숙(金星淑.1898-1969)선생은 1919년 '조선독립군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 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약산 김원봉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좌우가 통합된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선전위원, 국무위원등을 역임한 민주투사이자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일독립지사이다. 

 

- 운암 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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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창간 15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저항의 시기인 일제시대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중국에서 활동한 민족열사중 특히, 광저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운암 김성숙선생을 추모하며 현재 불산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친손자 두닝우(杜?武) 피아니스트를 라이프매거진 김대순 대표가 인터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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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행사로 한국 방문을 자주 하시는데, 그동안 한국은 얼마나 자주 가셨나요? 

 

한국은 연주활동으로 2002년 서울, 2009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초대 연주로 공연을 간 것이 다 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2017년 광저우 총영사관을 통해 한국국제교류문화재단 행사에 참석하였고, 올해 들어 지난 3월 KBS해외동포상 수상차 한국을 가서 다양한 한국 전통생활, 음식문화 체험 및 유적지를 방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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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다섯 번째 한국방문은 4월 8일부터 14일까지 독립운동가 후대들을 초청하는 행사중, 12일에는 저의 할아버지인 운암 김성숙선생 5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성가족부와 역사박물관이 함께 주관한 한국 3.1운동 100주년 여성운동가 전시회에도 참가했는데, 여성운동가 중에 저의 할머니 두쥔후이(杜君慧)께서도 1943년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한국독립운동에 기여하였기에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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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행이 드물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환경적이었죠. 고등학교 졸업후 바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오랫동안 미국에서 거주했습니다. 또한 부인이 한국인이지만 한 살 때, 이민을 가다보니 한국보다는 미국이 편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래서 한국 갈 기회가 그동안 없었네요.

 

부인과 교제할 때, 한국인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인연은 두 사람이 서로 맞으면 될 뿐이죠. 우리는 뉴욕줄리어드음악원에서 만나 사랑을 했고, 그녀가 한국인이어서 특별하게 사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연애 때, 장인께서 저의 할아버지에 대해 잘은 모르시나, 제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점은 높이 사셨기에 결혼까지 승낙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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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에 대하여 잘 아시나요?

 

어릴 때 할아버지가 한국 임시정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매스컴에 나온 이야기보다 당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평소 수영을 즐기던 할아버지가 어느날 멀리 헤엄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뻔한 이야기, 저희 아버지가 9살때, 무한(武?)에 거주하셨는데, 할아버지의 전우인 약산 김원봉(金元?)이 집을 놀러 오셨을 때 서양식 과자를 가져왔는데 그렇게 맛있는 과자는 처음 먹어보았다고 합니다.

 

늘 가난에 쪼들리던 할아버지는 항상 배불리 먹지 못하시고 음식들을 늘 아들들에게 남겨 주었대요. 자주 배고픔을 참고 일을 했는데, 할아버지만의 배고픔을 달래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배와 책상 사이에 베개를 놓으면 허기를 덜 느껴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다는 등 여러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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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 일가(중간의 부부와 아들들) 

 

이외, KBS해외동포상 관련 소개 다큐를 찍을 때 광저우총영사관에서 근무하셨던 강정애박사님께서 통역으로 저와 함께 동행해 주셔서 광저우와 주변 유적지를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 및 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외,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나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서예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붓글씨도 잘 쓰셨고 중국어가 매우 능통하셨습니다. 중문으로 평론을 쓸 정도로 중국어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서예에 뛰어나셨는데, 이게 바로 1978년 저희 할머니께서 매화꽃을 노래한 시를 직접 쓴 붓글씨입니다. (바로, 거실에 걸려 있는 할머니 작품을 소개해주었다)


김성숙 독립운동가의 손자인데 선생님 성함이 두닝우로 성이 두씨인 것에 궁금한 분들이 많은데요.

 

할아버지가 광저우 중산대학을 다닐 당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그후 아들 셋을 낳았는데 1945년 광복후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한국은 혼란기여서 할머니도 자식을 데리고 따라갈 생각을 했지만 여러가지 장애로 한국행은 무산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마흔을 넘긴 한창인 나이에도 재가를 하지 않고 홀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들 셋을 키우셨지요.

 

당시 할아버지가 떠나시고, 당장 자식들을 호적에 올려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모두 할머니의 성씨를 따라 두(杜)씨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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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두쥔후이 젊은시절 모습

 

할머니의 자식들은 첫째는 음악가로, 둘째는 화가로, 셋째는 항공분야에서 일하는 훌륭한 인재들로 키워 내셨습니다.


(2부에서 계속)

*본 기사는 라이프 제657호 5월10일자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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