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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미국의 홀대 속에 '쓸쓸한 귀향'한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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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31 21:44 조회11,4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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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32회] 대대적인 귀국환영대회를 열어준 이승만과 크게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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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백여 일이 1945년 11월 23일, 대륙을 유랑하던 임정 요인 제1진 15명이 환국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의 성명이 있기 전까지 이들의 환국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 권기봉
 

미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홀대하였다.

홀대를 넘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러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 회담을 가진 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1일 상해를 떠난 주한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에야 옥구비행장에 도착했다. 김성숙의 마음은 벅차 올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땅에 엎드렸다. 흙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코에 대어 보고 흙냄새를 맡았다. 다른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의 환국은 문자 그대로 '쓸쓸한 귀향'이었다. 


짤막한 귀국선언도 미리 발표되지 못하였고, 이들의 입국을 알 턱이 없는 거리엔 당연히 환영인파도 없었다. 임정요인들의 호송을 맡은 미군들의 태도도 거칠었다. 점심을 거른 그들에게 저녁식사도 대접하지 않은 채 헤드라이트를 켠 군용 지프차에 실어 밤길의 서울행을 재촉할 뿐이었다. 임정요인들을 급히 서울로 호송하라는 하지 장군의 명령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대부분이 노인들인 일행은 종일 비행기에 시달리고 지프차의 진동을 받게 되니 거의 혼절할 형편이었다. 논산에 이르러서야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튿날엔 다소 편한 일정이었다. 유성비행장에서 비행기로 서울에 왔기 때문이다. 이들 일행은 곧바로 제1진의 김구 일행이 머무는 경교장에 들렀다가 혼마치 호텔에서 고국에서의 둘째 밤을 맞았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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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미군정은 임정 요인들을 홀대했으나 뒤늦게 환국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하였다. 요인들이 머문 경교장과 혼마치 호텔 주위에는 연일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김성숙도 숙소에서 나와 야수적인 일제치하를 견뎌낸 동포들을 위로하면서, 해방이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임정요인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5년 12월 3일 경교장에서는 김구의 주재 아래 임정 국무위원회가 열렸다. 환국 이후 첫번째로 열리는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는 이승만이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해 국내외 정세를 보고하고 장래의 전망에 관해 한차례 연설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임정 요인들이 활동 않고 가만히 있어도 대한민국정부는 잘 수립될 것이라는 투로 그 특유의 고답적인 언사를 늘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1차 국무위원회에서 김성숙은 중국 상해에서 이미 결정된 약법3장의 결행을 다시금 촉구하였다. 그 자리에서는 비상국민대표대회의 소집을 통해 임정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임시의정원을 확대ㆍ개선하는 문제를 토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선 좌ㆍ우 각 정당대표자를 소집하여 비상정치회의를 조직한 후 이 조직을 통해 다시 비상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다수로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한 임정 측의 독자기구가 먼저 구성되었다. 이름하여 특별정치위원회, 김성숙은 조소앙ㆍ장건상ㆍ김원봉ㆍ김붕준ㆍ유림ㆍ최동오 등과 함께 7명의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뽑혔다.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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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 권기봉 

환국한 임시정부는 해방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은 12월 31일 내무부장 신익희에게 「국자(國字)」제1호, 제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할 것.
3. 폭력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4.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용에 대한 방해를 금함.
5.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체함.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난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 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해방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 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입장이었다.

주석
5>이재명, 앞의 책, 439쪽.
6> 앞과 같음.